시댁의 선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정구엄마, 10월초 연휴땐 선산에 다녀와야겠어.』
달력을 들여다보던 남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잊고 지나쳐버리면 안될 중요한 일을 이제서야 생각해낸 것이 쑥스러운 모양이다. 해마다 한번씩은 꼭 다녀오지만 봄 가을로 두 번 다녀오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곤 한다.
시댁문중의 선산은 남편의 고향인 경남 함양에 있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함양을 우리의 신혼여행 행선지로 정해놓고 강행군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조상의 묘에 절 한번 못한채 5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관광명소도 아닌 조그마한 시골읍의 초라한 여관에서 여장을 풀며 참으로 서운한 마음이 되었을때, 새신랑은 『문중의 종부가 되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서 하는 여행인데 이럴 수가 있나 하고 화가 치미는데 남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리 없었고 다만 서운한 마음만 더할 뿐이었는데….
비록 수려한 경관은 아니었지만 녹음은 더없이 싱그러웠고, 허리를 넘는 보리밭을 가로 질러 선산에 다다랐을 때엔 참으로 값진 여행을 하고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조촐하나마 준비한 과일 등을 상석위에 차린후 경건한 마음이 되어 조상의 묘에 절을 올리고 비문을 깊이 새겨 읽으며 다시금 내가 남편과 하나가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떠나오던 날엔 신당골에 들러 눈먼 먼 친척 할머님께 인사드리며 참된 효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도 전통제례나 예의범절을 제대로 알지못해 실수만 저지르는 나에게 있어서, 조상의 선산으로 다녀온 신혼여행의 경험과 추억이 없었다면 근본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미숙하기 짝이 없는 며느리요,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단한번 다녀온 선산에 대한 기억이 이렇듯 선연하다는 것은 내가 진정한 「시댁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남편이 떠날땐 산지기할아버지께 조그만 정성이라도 들려 보내야겠다. 조혜란 <서울강동구 암사3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