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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안정’이 반갑지 않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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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종수
김종수 기자 중앙일보 부장
[일러스트=김회룡]
김종수
논설위원

경제 현상 중에는 보통사람들의 상식이나 직관에 어긋나는 일들이 더러 있다. 언뜻 보기엔 좋은 일 같지만 결과적으로 해가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견 경제에 부담이 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경우도 있다. 서민을 보호한다며 임대료 상한을 두어 규제하면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이 덜어질 것 같지만, 실은 임대주택 공급을 줄여 집 없는 서민을 아예 거리로 내쫓는 결과를 빚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세율을 올리면 세금이 더 걷힐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금이 덜 걷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가는 어떨까. 보통은 물가가 안정됐다고 하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계의 지출 부담을 덜어줄 수 있으니 수입이 같다면 보통사람들의 실질소득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가가 장기간 오르지 않거나 하락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상황이 되면 물가 안정이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 물가가 낮아지면 소비자는 좋겠지만 물건을 만들어 파는 공급자에겐 손해다. 공급자가 꼭 손해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전보다 이득이 줄어드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공급자의 수입 감소는 경제 전체로 볼 때 국민소득이 줄어드는 결과를 부른다. 국민소득의 축소는 소비를 위축시킨다. 소비가 위축되면 수요가 줄어 물건 값은 더 떨어진다. 바로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가가 안정됐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닌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나타난 세계적인 유가 하락도 얼핏 보기엔 우리 경제에 호재일 것 같다. 일반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처럼 원유 수입이 많은 나라에서는 에너지 비용을 낮춰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이고, 기업의 원가를 떨어뜨려 소비 증대와 함께 생산과 투자가 늘어나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다.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국내 소비는 줄고, 생산과 투자도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유가 하락의 경제성장 기여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올해 세계 경제와 국내 경제는 모두 당초 성장 전망을 밑돌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오랜 내수의 부진이 유가 하락을 선순환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에너지 관련 산업의 위축만 불러왔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1월 소비자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8% 오르는 데 그쳤다. 지난해 12월에 이어 두 달 연속 0%대의 물가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물가가 안정돼도 너무나 안정됐다. 사실 이런 ‘물가 안정’ 추세는 지난해 내내 계속됐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전달보다 물가가 떨어진 달이 여섯 달 가운데 네 달이나 된다. 생산자물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 지난해 내내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그치지 않았던 이유다. 새해 들어서도 이어지는 0%대의 ‘물가 안정’이 반갑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 때문에 지난해 말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포함한 디플레이션 방어대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굳이 말하자면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 유발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실 인플레에 관한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털어버릴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물가 상승을 유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경환 경제팀이 지난해 말부터 부쩍 ‘경상성장률’의 회복을 강조해 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질 성장률의 회복이 더딘 마당에 물가마저 오르지 않으니 체감경기가 좋아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통화정책을 전담하는 한국은행은 물론 정부 스스로도 ‘물가 안정’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은은 지난달 30일 이례적으로 ‘인플레이션 보고서’를 내고 “우리나라에서 (일본, 대만과 같은)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강조했다. 다분히 일본식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한은에 금리 인하를 요구한 KDI에 대한 반박으로 비친다. 한은의 논점은 작금의 저물가가 수요 부진보다는 공급 측면(유가 하락 등 원가 인하)의 하방 압력이 주 요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은과 KDI 주장의 차이는 최근 저물가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귀결된다. 최근의 유가 하락만 보면 한은의 주장대로 공급 측면의 물가 하락 압력이 큰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소비자물가가 10분기 연속으로 한은의 물가안정 목표(2.5~3.5%)를 밑돈 점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논리라면 한은이 뒤늦게 지난해 기준금리를 세 차례 인하한 것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제 정부와 한은은 구차하게 보고서를 통해 ‘디플레이션 논쟁’의 대리전을 치를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작금의 경기 상황에 대한 인식부터 조율해야 할 것이다.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없다면 정부도 깨끗하게 금리 인하 요구를 접고, 만일 일말의 디플레 우려가 있다면 한은도 정부의 경기대책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그에 앞서 ‘물가 안정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부터 깰 필요가 있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