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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기자의 ‘아웃사이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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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정말 맛있죠.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 몇 분이면 후딱 끓여낼 수 있는 간편함, 거기다가 저렴한 가격까지…가끔 정말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라면을 좋아하다 보니 이틀에 한번 꼴로는 라면을 먹는 것 같습니다. 요새 라면을 먹을 때면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 강남소방서의 백균흠 진압대장입니다.

두 달 전 쯤 취재를 위해 백 대장을 만났습니다. 강남통신이 연재하고 있는 ‘당신의 역사’라는 코너에서 소방관의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였습니다(중앙일보 강남통신 11월 26일자). 백 대장은 올해로 26년차의 베테랑 소방관입니다.

인터뷰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열악한 근무 환경, 몇 번의 죽을 고비, 순직사한 동료들의 이야기…매일 목숨을 거는 소방관 앞에서 하염없이 제 자신이 작아지더군요. 화재진압을 하다 2~3층에서 떨어지는 일 정도는 사고도 아니라며 털털하게 웃습니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할까, 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뭘까. 무언가 대단한 결심이나 사명감을 갖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을 물었습니다.

백 대장은 뜬금없이 라면 얘기부터 꺼내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 뭔지 아세요?” 1990년 첫 출동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비닐·스티로폼·플라스틱 등 불이 잘 붙는 소재로 된 완구가 가득 들어찬 지하창고였답니다. 당시엔 장비 사정이 열악해 공기호흡기도 없이 화재현장으로 진입했다네요. 그 날 하루에만 백 대장은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오전부터 시작된 화재진압은 저녁까지 하루 종일 이어졌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고 하루 종일 화염 속을 뛰어야 했습니다. 비까지 내렸던 날이라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솔솔 풍기더랍니다. 동네 주민들이 소방관들 고생한다고 한가득 라면을 끓여온 겁니다. 얼굴은 숯검뎅이에 몸은 축 늘어지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면서 그 라면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목에선 검은 가래가 끓는데 그 라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고.

20011년 구룡마을 화재현장에서 백균흠 대장이 집 지붕에 올라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소방관 업무의 80%는 실제 화재진압이나 인명구조와는 동떨어진 생활소방 업무라고 합니다. 대부분 길고양이 잡아달라, 잠긴 집 문 따 달라, 심지어 맨홀에 빠진 반지를 꺼내달라는 등 황당한 민원들입니다. 설·추석 같은 명절 때면 집 가스밸브 좀 잠궈달라는 민원도 많답니다. 겨울철엔 보일러 파이프관이 동파돼 물이 흘러 나오면 그 뒷처리도 소방서로 전화한다고 하네요. 요새는 집 나간 아들 찾아달라는 식의 위치추적 민원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매일 밤 1~2건 씩 위치추적 민원이 들어오는데, 그럼 소방관은 통신사로부터 대략적인 위치를 전송받아 출동합니다. 그렇게 꼴딱 밤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야속할 때도 많습니다. 화재진압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문·창문 등을 파손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데 소방관이 개인돈으로 배상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백 대장도 그런 일을 종종 겪는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옆 짚에 불이 난 것 같다는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습니다. 도착하니 창문 밖으로 자욱하게 연기가 세어 나왔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해 문을 부수고 진입했는데, 집주인이 음식을 가스렌지 불 위에 올려 놓고 집을 비운거였습니다. 소방관이 출동한 덕에 자칫 화재로 번질 수 있었던 상황을 막은거죠. 그런데 돌아온 집주인은 “왜 허락도 안받고 문을 부수었냐”며 변상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소방관들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야 할 일인데,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도 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119에 전화를 해 본적은 없습니다. 큰 사고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다행인거죠. 앞으로 살다보면 언젠가는 소방관의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있겠죠. 그 때는 꼭 뜨끈한 라면 한 그릇 끓여 내야겠습니다. 고맙다고, 고생하신다고.
 
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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