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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보행영토 넓힌 선진국 해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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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홍콩 침사추이 해안 산책로에 조성된 ‘스타의 거리’에는 배우 리샤오룽(李小龍)의 동상이 있다. 이곳은 관광객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홍콩의 야경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장소라 ‘스타의 거리’는 늦은 밤까지도 늘 붐빈다(큰 사진). 아래 사진 왼쪽부터 각각 영국 맨체스터, 미국 내슈빌·멤피스·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상징물. [사진 조현진]

지난해 11월 중앙일보가 기획한 ‘보행영토를 넓히자’를 관심 갖고 읽었다. 단순히 보행영토만을 넓히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채울 콘텐트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스토리가 있는 지역에 위치한 거리는 콘텐트 생산이 상대적으로 쉽겠지만 스토리가 없거나 약한 지역이라면 콘텐트 생산은 영원한 숙제이자 고민이다. 보행영토라는 개념에 우리보다 일찍 눈뜬 선진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고민 끝에 이들이 제시한 해답은 대중문화를 활용해 거리에 스토리를 입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명예의 거리(Walk of Fame)’다.

 선구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다. 1960년 3월 첫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15개 블록에 걸쳐 조성돼 있다. 취지는 단순하다. 세계 대중문화의 수도인 LA가 대중문화 발전에 공헌한 인물을 기리는 거다. 구성도 단순하다. 별 모양 안에 해당자 이름과 종사 분야 표시가 전부다. 스타로 선정되는 분야는 영화·TV·음악·라디오·무대예술 등 모두 5개 부문이다. 영화의 도시답게 영화 부문 선정자가 거의 반에 가깝다. 현재 2500여 명의 스타가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배우 진 오트리는 유일하게 5개 부문 모두에 헌액된 스타다.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은 이곳의 유일한 전직 미국 대통령이다.

 그 어떤 콘텐트도 변화가 없으면 세월이 지나면서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명예의 거리를 처음 조성하고 관리하는 할리우드 상공회의소는 그래서 늘 새로운 관심과 볼거리를 고민한다. 하여 가끔 순수 대중문화인은 아니지만 납득할 만한 범위 내에서 스타를 추가로 선정해 일반의 관심을 고취하는 전략을 택한다. 2002년 스타에 헌정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대표적이다. 선정위원회는 5개 부문 중 무대예술 부문에 알리를 포함해 스타 헌정을 결정했다. 알리의 스타는 거리에 새겨지지 않고 특별하게 건물 벽에 조성된 처음이자 유일한 경우다. “누가 내 이름 위로 걷고 지나가는 것이 싫다”는 평소 그의 뜻을 존중한 것이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는 지금도 매달 평균 두 명의 스타가 새로 선정된다. 무료면서 하루 24시간 방문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이어서 연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것으로 집계된다.

 LA 명예의 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89년 모습을 드러낸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시의 명예의 거리는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T S 엘리엇, 미 프로야구 전설 요기 베라, 언론계 최고 권위인 퓰리처상의 영감이 된 조셉 퓰리처 등 직업에 관계없이 이 도시 출신 유명 인사들로만 구성돼 있다. 명예의 거리 중심에는 이 도시 출신으로 로큰롤 초기 선구자인 가수 겸 기타리스트 척 베리의 동상도 제막됐다. 거리에 새겨진 스타 안에는 해당자 이름만 있고 그 밑에 경력이 따로 소개되는 점이 LA 명예의 거리와 구별된다. 이를 조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조 에드워즈 프로그램 감독은 “LA 명예의 거리를 걸을 때 누구인지 모르는 이름이 너무 많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세인트루이스는 경력 소개를 포함시키기로 했다”고 필자에게 밝혔다.

 2006년 조성된 미시시피 블루스 트레일은 블루스 음악만을 위해 조성됐다. 주제가 더욱 세분화된 것이다. 19세기 말 흑인들의 영가나 민요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블루스는 훗날 로큰롤로 발전하며 오늘날 대중음악의 출발점 역할을 한다. 초기 블루스가 태동하고 번성했던 지역이 미국 중남부에 위치한 미시시피주다. 대중음악에서 블루스의 중요한 역할을 기념하기 위해 미시시피주는 블루스 음악과 인연이 있는 특정 지점에 기념 푯말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한 거리를 지정하기보다 블루스와 연관된 스토리가 있는 곳이면 해당 지역을 찾아가 도로에 푯말을 설치한 점이 기존 명예의 거리들과 다르다. 푯말 형태는 어디를 가도 동일하게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170여 개가 설치됐는데 미시시피주를 벗어난 미국 내 주요 블루스 음악 도시들은 물론 멀리는 유럽의 프랑스나 노르웨이에도 기념 푯말이 조성돼 있다.

 이 밖에 로큰롤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로 유명한 도시 멤피스는 이곳에서 활동한 음악인들만을 기리기 위해 중심 도로인 빌가에 명예의 거리를 마련했다. 또 컨트리 음악의 수도 내슈빌은 컨트리 음악인을 위해 마련된 명예의 거리가 각각 조성돼 있어 보행자를 즐겁게 해준다.

 영국의 맨체스터시는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 세계 대중음악 흐름을 주도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지역 출신 주요 아티스트들을 위한 명예의 거리를 90년 시내 중심 도로인 올드햄가에 조성했다.

 리버풀시의 매슈가는 록밴드 비틀스가 로컬밴드에서 글로벌 스타로 도약하는 데 발판 역할을 한 전설의 캐번(Cavern) 라이브 클럽이 있어 늘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스토리를 입히기 위해 캐번 무대에 선 아티스트 1800여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벽돌에 새겨 97년 ‘캐번 명예의 벽’을 제막하고 존 레넌의 동상을 세웠다.

 아시아에서 거리에 스토리를 입히는 노력은 홍콩에서 시작됐다. 홍콩은 2004년 침사추이 해안 산책로를 따라 ‘스타의 거리’를 조성했다. 리샤오룽(李小龍), 청룽(成龍), 저우룬파(周潤發) 등을 앞세워 한때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점을 부각시킨 이 거리에는 홍콩 출신 영화인 100여 명의 핸드프린팅 등으로 조성돼 있다.

조현진 국민대 특임교수·미래기획단장 gooddreams@hanmail.net

조현진은 … YTN 기자 출신으로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 특파원으로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에서 외신과 해외 홍보를 담당했으며, 제2부속실장을 지냈다.

[S BOX] 방향 못 잡는 강남 ‘한류스타 거리’, 송파 ‘스타 애비뉴’

성공적인 한국형 명예의 거리 조성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

 먼저 주제 설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LA의 5대 엔터테인먼트, 홍콩의 영화처럼 특정 분야로 할지 아니면 멤피스나 리버풀처럼 도시 중심으로 할지 큰 틀 설정이 출발점이다. 서울 강남구청이 지난해 3월 선포한 1.08㎞의 ‘한류스타 거리’는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철학이 없었다. 대구 ‘김광석 길’ 같이 가수 한 명만으로도 확실한 호응을 얻을 수 있음을 ‘강남 스타일’은 배워야 한다.

 선정 기준은 엄격해야 한다. 외국 명예의 거리는 헌정 대상자를 선정하는 위원회가 있고 투명하면서도 납득할 만한 기준이 있다. 책상 기안이나 지인 추천에 의존한 전형적인 후진형 스타 선정은 빈곤한 콘텐트를 양산하며 존재감 없는 거리로 단명할 것이다.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한류 명소를 표명했던 많은 곳은 주도한 기관장이 물러나거나 담당자 업무가 바뀌면 관심 밖에서 멀어지곤 한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K팝 명예의 거리를 지향하며 조성된 스타 애비뉴가 그런 예다.

 단순함을 추구하라. 명예의 거리를 추구하는 많은 한국의 거리들은 핸드프린팅 확보에 주력한다. 핸드프린팅은 물론 매력적인 소재다. 그러나 모든 스타들의 핸드프린팅을 확보한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미 숨진 스타들도 한둘이 아니다. 외국 명예의 거리를 보면 스타의 이름만으로도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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