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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7) 제79화 육사졸업생들(200) 대전의 송별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대전 원동국민학교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생도들은 7월6일 아침식사시간에 생도1기의 임관식이 7월10일에 거행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7월9일밤 생도1기와 생도2기생이 석별의 정을 나누는 송별회가 대전 국일관에서 열렸다.그러나 연회분위기는 시종 침울했다고 한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동기생이 많았고 들려오는 전황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날밤 송별회에 참석한 생도1기는 불과 1백34명이었다.
술이 한잔씩 돌아가자 1기생 사이사이에 끼어앉아있던 2기생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40여일동안의 육사생활과 전쟁터에 생사를 같이하며 선후배를 뗘나 형제처럼 보살펴주고 지도해준 1기생과 헤어짐이 가슴을 저미는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만날 기약도 없는 슬픈 연회가 무르익으면서 장내가 소란해졌다.
술이란 언제나 묘한것이지만 술이 거나해지자 그동안 한번도 상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던 1,2기생들은 격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고한다.
『왜 사관생도를 임관도 시키기전에 총알받이로 전선에 내 보냈느냐』고 성토하는 생도가 있었고 『지휘부의 무리한 작전으로 많은 동료가 희생되었다』고 흐느끼는 생도들도 많았다고한다.
한채섭생도는 대전에 내려오기전 생도들이 마지막으로 투입되었던 수원방어전에서 총상을 입고 자폭한 김해선생도 이야기를 끄집어 내 장내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1기생중 가장키가 작았던(1m65cm) 김해선생도는 판교에서 격전중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때 후퇴명령이 내려 김생도 옆호에서 전투중이던 박창읍생도가 김생도에게달려가 등에 업힐것을 권했으나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자네만이라도 뗘나라』고 했다는것이다. 박창읍생도가 『무슨소리냐』며 옆 진지에있던 한채섭생도를 부르러 호를 나오는 사이에 귀를 찢는듯한 폭음이 들렸다. 김해선생도가 자폭한것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퇴각때 동료에게 피해를 주기 보다 자폭으로 끝을 맺은 아름다운 동료애의 표본이라할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졸지에 동료를 잃은 박생도는 김해선의 처참한 시신을 내려다 보며 한동안 울다가 자신도 날아온 총탄에 가슴을 맞고 호속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옆호에 있던 한채섭생도는 김해선·박창읍생도의 시체를 흙으로 덮고 그자리를 떴지만 그도 임관후 7사단에 배속되었다가 8월13일 경북 안강전투에서 산화했다.
김해선생도는 해방후 중국에서 돌아왔다. 고국이라고 돌아오긴 했지만 친척도 별로 없었다. 양친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병사해 그의 유일한 보호자는 매부인 이준직장군뿐이었다. 이준장의 권유로 육사에 들어갔던 그는 언제나 모든 일에 앞강서「교장의 처남」이라는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고 한다.
김해선생도와함께 같은 호속에 잠든 박창읍생도는 진주출신으로 전형적인 경상도사나이였다.
얼굴이 유난히 크고 이마가 툭 튀어나와 「앞짱구」로 통했었다.
수원방어전에서는 김해선생도 말고도 또한명의 자결자가 있었음이 송별회 석상에서 밝혀졌다.
강문봉대령(당시 육군본부근무·예비역육군중장)의 6촌동생인 강주봉생도였다.
강생도는 후퇴명령이 떨어졌는데도 꼼짝 않고 전방만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옆에있던 이종승생도가 빨리가자고 재촉하자 강주봉생도는 『먼저가라. 나는 이곳을 떠날수 없다. 나는 여기서 죽을거야』며 카빈총구를 턱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다는것이다.
함경도 출신인 그는 간도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해방후 월남, 용산중재학중 육사에 들어갔는데 성격이 좀과격한 편이었다고 들었다. 곱슬머리였던 강주봉생도는 아마 육사생이 전투마다 후퇴를 거듭한것이 못견디게 괴로왔던 것같다.
생도 1기생들은 지금도 수원방어전투에서 가장 잘 싸웠다고 자부하고 있다. 포천에서의 첫 전투때는 워낙 경험이 없었는데다 지휘부도 재대로 작전계획을 세우지 못했으나 수원방어전때는 배운 교리를 그대로 써먹었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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