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윤철규의 '한국미술명작선'] ⑦ 조선시대 외국인 화가 맹영광

중앙일보

입력

맹영광, ‘계정고사도(溪亭高士圖)’, 1640년대, 견본채색, 107.9×5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본국보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중국화가 가운데 목계(牧谿)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선승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남송이 원으로 교체될 때 그는 항저우의 서호 가까이에 있는 육통사(六通寺)에 머물며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와 동문의 승려 중에는 몽골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많았고 또 중국에 유학와 있던 일본 승려들 역시 속속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들이 목계의 그림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목계는 사후에 중국 본토에서는 그 이름이 거의 잊혀 졌습니다. 하지만 가마쿠라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이때 가져온 그림으로 인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정교한 필치로 관음보살과 학, 원숭이를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마치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소상팔경의 경치를 그린 것이 있습니다.

목계가 구사한 이런 기법은 당시 일본에는 전혀 생소한 테크닉이었으므로 당연히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론 이후로 많은 추종자들이 나오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3점은 현재 일본 국보로까지 지정돼 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그는 일본 수묵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중국 선승화가로 손꼽힙니다. 또 명성이 대단한 나머지 요즘도 옛 그림 가운데 잘 그려진 것이 있으며 목계가 그린 것으로 치부할 정도입니다. 일본에서의 이런 목계 열기로 인해 중국에서도 근래 맹렬한 재조사 끝에 중국 내에 그의 그림을 한 점 찾아냈다고 합니다.

목계의 경우처럼, 중국에서는 거의 무명인 채로 기록도 변변치 않지만 조선에는 널리 알려졌던 중국화가가 있었습니다. 인조 때 와서 궁중에서 활동한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입니다. 이 ‘계정고사도(溪亭高士圖)’는 그의 그림 중에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계정고사도’는 제목처럼 소슬한 가을바람이 부는 산속 정자에 앉아 있는 긴 수염의 고사를 그린 것입니다. 정자라고 했지만 규모가 상당합니다. 누어서 잘 만한 널찍한 탑상(榻床)이 마련돼 있고 그 안쪽으로 책, 향로, 화병이 가지런히 놓인 탁자가 또 갖춰져 있을 정도입니다. 벽한 쪽은 성긴 대나무 바자로 막았습니다.

정자 주변은 잘 다듬은 축석으로 터를 마련했는데 계곡 위에는 홍교를 만들어 한결 운치를 더했습니다. 한여름에는 제법 좋은 그늘을 제공했을 키 큰 나무가 주변에 서 있습니다. 누렇게 시든 잎이 달린 나무에는 등나무 넝쿨이 칭칭 감겨있습니다. 덩굴에서는 보라색 등꽃이 활짝 핀 모습입니다. 등꽃이 피는 계절이 주로 5월인 점을 보면 이는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다른 쪽 큰 나무는 붉게 물든 잎이 듬성듬성 달려있는 사이로 청록의 침엽수가 얽혀 있습니다.

먹을 중심으로 그리면서 인물과 실내 도구 그리고 일부 나무와 산에는 화려한 채색을 유감없이 썼습니다. 또 정교한 필치에 꼼꼼하고 치밀한 묘사는 상당히 수준 높은 전문가 솜씨임을 한 눈에 말해줍니다.

그림 위쪽에 있는 글은 맹영광 자신이 가을 경치를 시로 읊은 것입니다. 그는 말하자면 시도 읊고 그림도 그린 것이 됩니다. 그 시 뒤에 ‘회계 산인이 도진의 누추한 집에서 그리다. 낙치생(會稽散人寫自淘眞陋邸 樂痴生)’이라고 썼습니다. ‘도진’이란 ‘참을 가려낸다’는 뜻인데 도진의 누추한 집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합니다. 낙치생은 어리석음을 즐기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런 호를 쓰는 화가는 중국 쪽 기록에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낙치생이 그린 그림은 당시에 그려진 산수화들과 사뭇 다른 격조를 말해 줍니다. 우선 스케일이 다릅니다. 자연의 일부를 잘라내듯 산수 경치의 한 부분만은 다루고 인물을 비교적 큼직하게 그린 구도는 조선 중기의 그림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물이나 나무 그리고 정경을 묘사하는 필치의 꼼꼼함은 그 무렵 조선의 그림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또 배경의 산수, 정자와 인물 그리고 앞쪽의 큰 나무들이 하나씩 포개지듯 입체적으로 구성된 중층적 구성 역시 낯선 것입니다.

이렇게 복합적 구도 위에 치밀하고 꼼꼼한 묘사를 시도하는 것은 전형적인 중국 궁중화풍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솜씨는 당시 인조를 비롯해 조선의 사대부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조선화가들의 필치를 변화시키지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조 당시의 조정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던 이정이나 한시각 등의 그림을 보면 어떤 영향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목계와 맹영광이 미친 영향의 결과가 다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조선은 중국과 육지로 이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영향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있었습니다. 영향을 받으려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이 점은 한편으로는 자극에 둔감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면 영향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한국인의 심성이나 미적 감각에 맞는 것만을 중심으로 선별해 받아들였다는 해석도 가능할 듯합니다. 맹영광 그림이 인조 때 큰 주목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나버린 것은 이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맹영광(孟永光ㆍ생몰년 미상)
중국 청대 초기의 궁중화가로 자는 월심(月心), 호는 낙치생(樂痴生)입니다. 원래는 강남 소흥출신으로 청나라 초에 요동지방 여행 중에 발탁이 돼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조선과의 인연은 병자호란 때 심양이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김상헌과 가까웠던 듯합니다. 특히 김상헌이 심양을 떠날 때 그의 부채에 시를 적어준 내용이 전합니다. 이후에 그는 1645년 2월 소현세자 일행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3년 반을 머문 뒤에 1648년 가을에 중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무렵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조는 늘 그를 궁중에 가까이 두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하며 또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털옷과 여비를 주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조가 그토록 총애했으므로 궁중에 상당량의 그의 그림이 남아있었던 듯합니다.
30, 40년 뒤에 숙종은 자신이 아끼던 화원화가 이명욱에게 직접 도장을 새겨주면서 ‘낙치생의 필의를 이었도다(續樂痴生筆意)’라는 글귀를 쓴 것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전하는 맹영광 그림은 진위가 불분명한 것까지 포함해 10여 점이 있으며 일본에도 한 점 있습니다. 중국에는 전하지 않습니다.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