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739) 제79화 육사졸업생들(192) 생도1기 전선투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50년6월25일. 토요일 밤늦게부터 내리던 비가 그친 서을거리에는『국군장병은 즉시 원대복귀하라』는 확성기를 장치한 헌병 지프들이 거칠게 질주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도 정규방송을 중단하고『오늘 새벽 공산군이 불법으로 38선을 돌파하여 전면 침공해와 전선은 현재 교전상태에 돌입했읍니다』는 긴급뉴스가 반복해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종전에도 38선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가끔 있었기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날정오까지 별 동요없이 지냈다.
육본상황실에 도착한 나는 우선 전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북괴군 3, 4사단과 105기갑여단은 포천과 동두천을 침공, 의정부로 들어오고 있었으며 적1사단과 6사단은 개성·문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또 적2사단과 7사단은 화천을 거쳐 춘천으로, 동해안에서는 적5사단과 1여단 766유격대가 밀고 내려왔으며, 서해안 옹진반도에는 적6사단 1개연대와 3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침공해 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우선 국군7사단1연대에 동두천 방면을 지키도록 했으나 이미 포천지역 방어선이 뚫려 버렸다는 것이다. 「행군외박」을 나갔던 육사생도들은 뉴스를 듣고 속속 태능으로 돌아왔다.
채병덕참모총장은 포천방면의 방어에 육사생도 1기생을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지만 채총장의 이 지시에는 따를 수가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본관은 찬성할수 없읍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본관은 일본육사생도였읍니다만, 패전일로를 치닫고 있던 일본군부도 결코 사관생도를 전선에 내보내지는 않았읍니다.』
『그럼 이런 판국에 어떻게 할 작정이오. 묘안이 있으면 말하시오.』
채총장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나는 육사에있는 사관생도들을 빨리 한강이남으로 철수시키자고 말했다. 그러나 채총장은 『수도서울이 함락 직전에 놓였는데 생도라고 뺄 수는 없지 않소. 며칠이라도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이 전혀 경험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비교적 안전한 광릉쪽에 배치하시오』라고 명령한 뒤 더이상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않고 상황실을 나가는 것이 아닌가.
군대는 명령이다. 어쩔 수 없이 주번사령이던 이준학소령(7기생·예비역소장)에게 생도대의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왜 그때 좀더 강력하게 사관생도의 출병을 막지 못했을까 하는 회한은 6·25 33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사관생도에게 소총을 들게 해 전선으로 내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논리는 쉽게 말하면 이렇다.
1명의 생도가 임관되면 소대장 신분으로 40여명의 병사를 지휘, 40배의 전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3백명의 소위가 있다면 1만2천여명의 병력을 조직적으로 운용할 수있지 않겠는가. 이런데도 졸업을 며칠앞둔 생도들을 자동소총 사수로까지 내보냈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군번이나 계급장이 없는 사관생도를 전투에 내보낸 역사는 세계전사에서도 그 유례가 없던 것같다.
아뭏든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이준식교장과 이한림부교장(당시 대령)은 사관생도들이 귀영하는대로 부대를 편성했다. 육사 교도대 3백여명은 이미 오전중에 문산방면으로 출동시켰고 하오3시쯤에는 10기생 2백62명과 생도2기생 2백27명, 기간장병 80명이 연병장에 집결했다.
대대장에 조암중령, 부대대장에 손관도소령(5기생·미국이민), 제1중대장에 송인율대위(5기생·예비역대령), 제2중대장에 박응규소령(3기생·예비역준장·전국군묘지관리소장), 제3중대장에 이원엽대위(5기생·예비역소장), 작전주임에 이승우대위(5기생·예비역준장)가 각각 임명됐다.
10기생들은 소대장·분대장·부분연장·자동소총 사수로, 생도2기생들은 분대원이나 연락병으로 편성됐다.
생도들의 공용화기는 교도대의 교육을 박격포와 기관총및 자동소총이었으며 개인화기는 M1소총 뿐이었다. 개인별 실탄 휴대량은 56발(7클립)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