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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6년(13)항일의 해외기지④ | 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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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병합 이후의 조선총독부 무단정치는 이름 그대로 헌병·경찰의 탄압일변도였다. 탄압이 가혹했던 것만큼 민족의 저항도 줄기차게 이어져 나갔다. 그런 항쟁속에서 외국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데라우찌」가 펼치는 무단통치에 앞서 그런 무단통치에 저항했던 영국인「G·L·쇼」의 기록을 살펴보자.
당시 45세이던 「쇼」는 무역 해운을 겸한 중국 안동소재 흡강양행사주였다. 국경도시 안동은 상해임시정부와 본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였다. 독립운동 단체들로선 안동에 아지트가 필요했다. 이 역할을 떠맡은 이가「쇼」다. 「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일본외무성문서가 이를 말해준다.
『1919년이래 해외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점차 완강해져 안동은 조선·만주·상해의 불령선인이, 서로 연락 접선하는 요충지다. 「쇼」의 상사는 불령선인의 안동거점이 되어있다. l919년 의친왕망명기도사건 연루자의 취조기록에 의하면 이공은 국경을 넘은 뒤「쇼」 상사에 은신했다가 이 회사 소유 기선편으로 상해로 탈출할 계획이었다.
20년봄이래 압록강 연안지방은 독립군의 습격으로 피해가 심각하다.
이 원인은 만주지역 불령선인이 상해 가정부와 연락이 닿아 폭탄·탄약 기타 불온문서를 공급받기 때문이다. 이런 연락과 수송에서 불령선인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것이「쇼」의 안동∼상해간 기선이고 이룡양행이다』

<기선으로 운송맡아>
「쇼」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사건은 영·일외교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최근 특별취재팀이 가려낸 일본 외무성과 육군성 극비문서에 담긴「쇼」의 항일운동을 살펴보자.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 그는 중국어에 능숙하며 한국말도 약간은 한다. 「쇼」 는 조선의 한 금광회사 회계역으로 일하던 1903년 일본여인「사이또·후미」와 결혼했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사실상 일본에 넘겨진 1907년 한국을 떠났다.
그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압제에서 그의 조국 아일랜드를 연상하고 더욱 조선인을 연민하고 동정했다고 일본육군성 문서는 분석하고 있다. 육군성은 1919년 7월부터 검거되는 21년 9월까지의 「쇼」의 반일활동을 기록했다.
『①조선인들은「쇼」의 상사에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 제1차 선우혁, 2차 홍성맹, 3차 양반명, 4차 장덕노가 국장으로 취임, 상해임시정부와 조선내의 연락교류를 담당했다.
②「쇼」는 상해∼안동간을 내왕하는 자기소유 기선 계림호로 상해임시정부등 불온단체의 무기·탄약·폭탄·불온문서를 운반했다. 예를들어 20년5월15일에는 계림호에 상해임시정부 비서국장겸 주계국장 고일청외 수명이 타고 있었는데 「쇼」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관헌이 선창을 지키고있어 상륙은 위험하다고 알리고 기선을 하류로 내려보내 대동구 충합에 상륙,은신케했다.
③1919년8월 상해임시정부 재무원 주찬칙이 조선에서 모은 군사자금 1천2백18원을 교환하지 못해 곤란을 겪자「쇼」는 자신의 상해거래은행 수표로 바꾸어 주었다.
④20년1월23일 안동교통국장 홍성익이 체포되자「쇼」는 임시정부에 이 사실을 전보로 알리고 후임을 속히 보내라고 연락했으며 양준명이 후임으로 오자 활동방향을 지도했고 함께온 대한청년단연합회편집부장 함석은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이상은 작은 예에 불과하다.
⑤21년7월4일 안동현구련성 하류약1마일지점의 연와에 있는 중국인 마모씨의 집에 불령선인 10여명이 집합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 7월10일상오0시「이또」부보는 12명의 경찰을 2척의 소형선에 분승시켜 출동, 새벽3시 이집을 포위, 급습했다. 조선인은 권총으로 저항하며 일부는 도주하고 13명을 체포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 안동지역책 오학수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가택수색결과 폭탄·폭탄제조기와 그원료, 권총실탄 65발, 기타약품·서류 다수를 압수했다. 조사결과 「쇼」는 자기의 상사에 대한 일본경찰의 감시를 알고 중국인 마씨의 집을 13원의 월세로 빌어 불령선인단체의 안동출장소로 사용하도록 했음이 확인되고 그 증거문서도 압수했다.

<일,「쇼」항일 기록>
압수된 무기류는 오학수 일당이 상해에서 이탁을 통해 입수, 7월9일에 계림호편으로 안동으로 수송했다. 수송궤짝엔 「수이항양행」이란 딱지를 붙여 교역품으로 위장했고 「쇼」의 창고에 보관했다가 국내반입을 위해 그전날 이곳으로 옮긴 것이 확인되었다』
일본당국은「쇼」의 반일활동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가 영향력 있는 영국인이어서 손을 쓰지못했다. 일본외무성은 21년3월초 봉천주재총영사를 통해 봉천주재 영국총영사에게 「쇼」의 반일활동을 경고해 주도록 요청했다.
영국총영사는 충고서를 「쇼」에게 보냈으나 묵살당했다. 그 두달후인 5월중순 일본경찰은 계림호에 임시정부요인 수명이 승선했다는 정보를 입수, 봉천의 영국총영사관에 협조를 요청하고 선참으로 출동했으나「쇼」의 방해로 체포하지 못했다.
일본측이 영국총영사관에 엄중항의하자 영국총영사는 「쇼」가 장래에도 반일활동을 할때 일본측이 증거를 제시. 통보해주면 상해의 영국영사재판에 「쇼」를 기소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던 중 오학수사건이 일어나고「쇼」의 반일활동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체포과정의 기록을 옮겨보자. 『21년7월11일 「이시구로」(석묵) 제3부장은 급거 안간에 출장, 현지영사당국과 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쇼」가 일본을 다녀오는 그의 가족을 마중하기 위해 조선의 양책역까지 간다는 정보가 들어와 조선총독부에서 「쇼」를 체포하도록 수배했다.
「쇼」는 그날 하오 5시40분 안간역에 도착, 「요시하라」(길원) 순사에게 가족마중을 위해 양책역까지 가니 여권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요시하라」는 그의 권한밖이라고 이를 거부했다. 그랬음에도 「쇼」는 여권없이 승차했는데 열차내 검열담당총독부 순경이 「쇼」를 체포했다.
신의주경찰서는 「쇼」를 취조, 형법내란에 관한 죄를 적용하고 내란죄는 경성고등법원의 특별관할에 속한다고 판단, 7월26일 사건을 경성고법에 이송했다. 경성고법은 8월6일 오학수등 그간의 연루자 24명과 함께「쇼」를 기소했다. 그의 내란죄 협의는 그동안 체포된 불령선인의 취조에서 밝혀진 사실이 모두 일거되었다.』

<경성고법서 기소>
사건은 영·일간의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봉천주재 영국총영사는 봉천주재 일본총영사에게 「쇼」의 .반일활동은 영국의 상해영사재판에서 관할키로 한다는 영·일총영사간의양해사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7월22일 영국정부는 이 사건은 극동에 있는 영국거류민의 지위와 위신에 관한 문제로서 중요시한다고 성명하고 항의문서를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극동의 영국거류민과 영국계 신문들도 일본의 조치를 맹타했고 급기야 영국하원의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9월까지 계속해 영국정부의 외교각서가 일본에 전달되었다.
①영국시민의 중국에서의 행위에 대해 일본이 사법권을 발동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②「쇼」가 극히 짧은 기간 일본통치권지역에 여행하는 기회를 이용해 체포한 것은 일본정부가 영국인을 영국영사재판 관할에서 탈취한 행위다.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각서의 요지였다.
일본정부는 ①「쇼」의 일본내란죄에 대해 봉천주재 총영사를 통해 두차례 경고했다.
②「쇼」의 영국영사재판 회부에 대해 검토했더니 영국의 법률엔「쇼」의 반일활동을 규제할 법률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③그럴때 마침 「쇼」가 여권없이 조선을 여행하고 있어 조사하게 되였고 조사과정에서 내란죄도 문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중국내영사재판을 배제하자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영국의 항의가 점차 강경해지자 일본은 사건이 사법재판소로 넘어갔기 때문에 행정부로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발뺌하기에 이르렀고 영국은 영·일동맹체제를 재고하겠다는 강경자세로 나왔다. 결국 일본측이 굴복하기에 이른 과정을 담은 외무성문서를 옮겨보자.『일본정부 의도는 「쇼」가 이후 불령선인을 원조치 못하도록 하는데 있고 처벌은 다음문제며 양국간 분쟁은 원치 않는바다. 이런 원칙아래 정부는 영국정부에 대해 법률상의 쟁점은 도외시하고 영·일동맹에 기초하여「쇼」를 보석하겠다고 통보했다.
물론 보석허가가 나면「쇼」는 안동으로 자유롭게 돌아간다는 것도 보장했다. 다만 희망사항으로 「쇼」가 안동에서 퇴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경성고법 예심판사는 보석금 1전5백원으로 「쇼」의 보석을 허가했다. 「쇼」는 구속 4개월만인 11월9일 석방되어 경성주재 부영사 「커닝햄」과 함께 안동으로 돌아갔다.』

<"안동서 떠나달라">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국정부는「쇼」의 석방직전 영국의 요구는 무조건 석방이지 보석엔 동의하지 않는다고 통고했다.
일본정부는 영국의 이의에도 불구하고 마침 보석금을 받은 뒤여서 서둘러 석방해 버렸다.본국정부 훈령에 따라 동경주재 영국대사는 일본정부에 대해 보석금의 반환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보석금반환은 결과적으로 일본경찰의 「쇼」의 체포가 불법행위임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해서 이를 거부했다. 영국측 항의가 강경해지자 일본 정부는 한걸음 후퇴, 보석금의 반환형식이 아니라 「쇼」가 이 사건으로 입은 손실을 참작해 이를 보상한다는 명목으로 보석금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겠다는 타협조건을 제시했다.
일본외무성의 문서는 이런 타협안에 대해 영국정부도 일본정부 입장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자국의 위신을 내세워 타협안 수락을 주저해 분쟁이 계속중이라고 썼다.
그런데 석방후의「쇼」의 행동에 의해 보석금 분쟁은 전혀 다른 국면에 부딪쳐갔다. 육군생문서가 그후의 「쇼」를 추적하고 있다.
『▲「쇼」가 돌아오는 안동역엔 봉천주재 미국영사·중국세관원등 26명이 환영을 나왔다. 「쇼」는 안간역을 나서면서 일본의 안동경무서 취재순사의 가슴을 치고 모욕을 했다.
다음날인 20일엔 미국부영사·중국세관원등 10여명을 초대, 파티를 열고 일본관헌의 구속과 조선통치가 모두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구류 하루를 5백원으로 쳐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호언했다.
▲12월19일엔 조선을 경유, 하르빈에 갔으며 곧 그의 두 아이의 캐나다여행 허가를 얻기위해 동경주재 영국대사관에 들를 것이라고 말하고있는데 이것은 그가 내세운 표면의 목적과 달리 손해배상 소송관계를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음해 1월26일엔 상해로가 상해가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안창호등이 베푼 환영연회에 참석해 조선은 곧 독립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상해에서 발간되는 미국계신문원동시보가 그가 구속되었을 때 명예훼손 보도를 했다하여 변호사 「벤젠」을 대리인으로 하여 5만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미국 영사재판에 제기했다.
▲「쇼」는 조선인 김문규를 상사직원으로 채용, 반일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김문규는 인천출신 당36세로 1912년9월 안동세관에 취직했다가 21년3월 퇴직과 동시 「쇼」 상사번역사로 가 일시 두절되었던 상해∼조선간의 연락을 재개했다. 21년11월께 상해임시정부원 신창희·고준택은 안동하류 모처로 와서 김문규와 접선, 수배중인 오인석·최준이 안동에 올 때 은신처를 제공하도록 요구했다. 김은 며칠 후 두 사람이 오자 상사내에 거주하던 중국인 곡모를 이사가게하고 이곳에 거주하게 했다.
이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테러활동을 하다 이듬해4월 상해로 돌아갔고 후임으로 강경선이 상해에서 파견되어 상사내에 거주하고있다.
▲상해임시정부 통신원으로 평북벽동경찰서 순사 허알을 납치, 살해한 최석순이 21년봄 일당인 김창의·김세창과 함께 상해에서 안동에 와 「쇼」 상사에 4∼5일 머물다 모처로 가 공작을 하고 다시 돌아와 10여일 머물다 상해로 돌아갔다.
▲상해모험단원→광복군암살대장으로서 l919년 평북 철산·용천·의천등지를 돌며 군사자금 수집을 위한 강도를 하고 그해8월 의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사형선고를 받았던 임득산이 22년1월7일 상사에 은신해 있다가 갔다.
▲독립신문 안간지국장으로서 20년, 21년에 걸쳐 평북도내 여러곳을 돌며 군사자금 모금을 위해 강도를 한 이윤병이 22년7월께 동상사에 7일간 머물다 본거지 상관전현으로 돌아갔다.

<"일의 통치는 불법">
▲독립신문 통신부장 신창희가 군사자금 모집을 위한 국내잠입을 위해 동상사에 은신해 있다가 갔다.
▲21년1월 평북철산의 부호 오희원의 여식살해범이며 광복군통신부장인 김창의가 22년7월 동상사에 들러 2일간 머물다가 갔다.
▲22년9월 상해의 오인석이 독립공채 액면l친원권 10장을 김문규에게 보냈다.
김문규는 이를 안동의 원광상회장희봉에게 7장을 떠맡기며 태평양회의에 임정대표자를 파견할 비용이니 7천원을 내라고 강요했으며, 또 안동현4번지 유정호쟁 장기식에게 공채2장을 강매했다.
이상 활동에 비춰 김문규를 방치할 수 없어 신의주경찰서장은 김문규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 22년8월21일부로 평북도 경부로서 관동청순사도 경무토록 발령한 형사2명을 안동에 밀파, 대기하던 중 8월27일하오6시께 김의 외출을 포착, 거리에서 체포해 조선으로 압송하고 서둘러 신의주지방법원 예심판사에게 송치했다. 중국당국은 주권침해라고 항의, 김문규의 석방을 요구하고 체포한 형사의 처벌을 요구했다. 특히 중국당국은 김문규체포당시 형사가 발사한 권총유탄에 중국인통행인이 맞아 부상했다고 통고하고 치료비와 위자료를 청구했다.
이사건이 나자 「쇼」는 그의 사무실에 있던 불령선인 강경선등 수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 은신케한 뒤 자기의 사용인 김문규를 불법체포해 갔다고 북경외교단에 호소했다. 이 호소에 따라 봉천주재 영국부영사 일행4명이 10월7일 안동에 와서 「쇼」의 상사를 방문, 체포경위를 조사하고 일본경찰이 중국내에서 불법체포를 했다고 북경외교단에 보고서를 올림으로써 사건을 북경외교단에까지 확대했다. 북경외교단은 북경주재 일본대사관에 대한 공동제재문제를 검토하고있다.「쇼」는 또 변호인단도 구성, 김문규 구출에 나섰다. 「쇼」가 안동에 건재해 있는 한 안동을 거점으로한 불령선인의 조직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막기가 거의 불가능하므로 근본적인 방책이 요구된다』
일본당국의 문서는 여기에서 끝나있어 「쇼」의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당시 국내에서 발간되던 선문에선「쇼 」의 체포나 영·일분쟁을 단 한줄도 찾아 읽을 수없다. 다만 23년도의 한 신문에「쇼」의 이륭상사는 암살단의 은신처라는 보도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쇼」는 점차 무력해진 중국관헌을 밀어제치고 안동을 실질적으로 일본이 지배하게되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디론가 옮겨갔지않나 짐작될 뿐이다. <지별 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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