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美와 관계 회복 물거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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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리야드에서 발생한 연쇄 자살 폭탄 테러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이 크게 난처해졌다.

우선 최근 수년간 사이가 벌어져온 맹방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지게 됐다.

9.11 테러 용의자 19명 중 15명이 오사마 빈 라덴을 위시한 사우디아라비아인들로 밝혀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 양국 관계는 이라크 전쟁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미군의 공군 기지 사용 요청을 거부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양국은 걸프전 이래 12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해 온 미군 병력을 올해 말까지 철수시키기로 합의함으로써 불편한 관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런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방문이 양국 관계를 회복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번 테러로 물거품이 됐다.

다급해진 사우디아라비아 보안 당국은 테러 배후 수사에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을 합류시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을 의식한 조치다.

그러나 로버트 조던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국 대사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테러 직전 외국인 거주 지역에 대한 보안을 강화해 달라는 미국 측 요구에 늑장 대처했다"고 비난,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이번 테러는 경제회복을 위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몸부림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90년대 들어 유가 하락 현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경제가 크게 악화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악화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시장 개방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외국인 투자와 기업 진출이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내 이슬람 과격 세력의 반정부.반미 움직임은 더욱 힘을 받게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의 반미 감정도 크게 격화된 상태다.

그러나 이슬람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과격 세력을 압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난과 대미 관계 악화 등 악재에 시달려온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대규모 테러 사건까지 겹쳐 사면초가에 몰렸다.

서정민 중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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