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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5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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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내가 구십 년대에 세계의 변화를 지켜보며 밖에서 흘러다닐 적에도 국내의 그런 모양은 여전했다. 현실에서 떠난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연기가 사라지듯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김지하는 앞서 나온 유신 반대와 개헌을 청원한 문인 61인 선언이 있었을 때 우리와 함께 검거되었더니, 어디론가 잠적했다. 사실은 당국에서 그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서 우리가 그에게 피하라고 귀띔을 했던 터였다. 그는 남도로 떠돌다가 이미 지금은 둘 다 세상을 떠난 영화 제작자 김원두, 감독 이만희 등과 함께 흑산도에 가서 숨어 있었다.

김원두는 원래 소설가를 지망하던 문청이었는데 고향은 포항이다. 그때에는 가난한 영남 쪽 시골에 문청들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이문구처럼 전쟁 때에 좌익으로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둔 김원일.김원우 형제가 그렇고, 나중에 등단하는 김성동.이문열 등도 그랬다. 김원두는 양문길.김원일 등과 철도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에 철도고를 다니면 학비 전액이 무료여서 가끔씩 학원 잡지를 보면 그 학교 출신의 문학 소년들이 투고한 작품들이 눈에 띄곤 했다. 김원두는 그 행장이 기인이어서 늘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군대 가서 논산 훈련소의 매점에 배속되었는데 제법 푼돈을 만지는지라 휴가를 나오면 언제나 그가 막걸리 대포를 거하게 사곤 했다. 아마 그에게는 입대 전에 짝사랑을 고백했지만 들어주지 않은 상대가 있었던 게다. 미국 가서 수퍼마켓 주인 하다가 강도에게 총 맞아 죽은 작곡가 한 아무개가 그를 만나서 술길을 따라 다니다가 드디어 김원두가 사고를 치는 데 동참하게 되었다. 나는 나중에 한에게서 전말을 자세히 들었다. 원두는 우선 남대문시장에서 미제 완구로 나온 물총을 샀다고 한다. 겉모양은 45구경 권총을 그대로 찍어냈는데 크기와 자잘한 부속의 형태까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그리고 문방구에 가서 먹물 잉크 한 병을 사서 그득히 총 안에 채웠다. 그것을 야전 파카 안주머니에 찌르고 남산 드라마센터로 올라갔다. 원두는 술 한잔 거나하게 먹고 제법 비장한 얼굴이었다고. 극장 건물 옆의 연습실로 갔는데 어느 대학 연극반이 한창 막바지 리허설 연습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김원두가 군홧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모든 남녀 배역은 동작을 멈추고 바라보는데 연출 맡은 그 당사자가 의자에 앉았더란다. 김원두가 안주머니에서 물총을 꺼내어 겨누면서 말했다고.

-너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벽에 붙어!

모두 겁에 질려서 군인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손들고 벽에 가서 붙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내가 반신반의했더니 목격자 한이 말했다.

-야, 생각 좀 해 봐라. 군인이 야전 파카에서 뽑는데 그걸 진짜루 생각하지 물총으루 여기는 놈이 어디 있겠느냐?

그가 권총을 겨누고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서니 그녀는 연극 대본으로 얼굴을 가리며 '살려주세요 네, 살려주세요' 그랬다는데 총알이 대본을 뚫을 수 있을까 없을까로 훗날에도 논쟁거리가 되었던 대목이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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