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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높은 책상 두고 서서 8년간 번역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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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구약은 열려있는 책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구약학자 최의원(81.전 총신대 교수.사진 (右))박사는 8년 전 새로운 구약성경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훌쩍 키가 높은 책상부터 마련했다.작업을 서서 하기 위해서다. 당시 나이 73세. 10년 가까이 걸리는 번역을 내내 앉아서 할 경우 근육무력증 등이 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토종 성경'이 탄생했다. '새 즈믄(천년) 우리말 구약정경(正經)'(도서출판 신앙과지성, 1308쪽). '공동번역 성경' 등 공식 성경이 여러 판본으로 이미 나와 있는 가운데 등장한 '개인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공식 성경과 달리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탄력적인 번역을 시도한 이 성경은 읽기 쉽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외래어는 물론 한문투의 단어까지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는 큰 원칙 때문이다.

이런 원칙은 '버터' '치즈' 등 이미 익숙해진 단어들까지 순 우리말로 옮길 정도로 철두철미 적용됐다. '쇠젖기름' '쇠젖묵'등의 신조어 등장이 그것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장절(章節)도 쉽게 바꿨다. '레위기'는 '레위인들의 법전'으로, '민수기'는 '민족 방랑사'로 옮겼다. '룻기' '열왕기'는 '룻의 전기' '이스라엘 왕조역사'로 각각 표기했다.

이런 원칙 때문에 일부 어색한 대목도 눈에 띈다. 이미 익숙해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름진 낙토'로 옮긴 대목이 대표적이다. 히브리어 고유의 표현을 순 우리말로 옮긴 시도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번역이 신뢰할 만한 것은 철두철미 고대 히브리어 성경을 텍스트로 했다는 점 때문이다. 또 직역을 원칙으로 했다. 창세기 첫 대목을 보자.

"하나님이 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 그 무렵 땅은 초매('뛰어나게 아름다움'이란 뜻)하고 깊은 바다는 어둠에 잠겨 하나님의 영기는 수면에 감돌았다. 그때에 빛이 생기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 이어 하나님은 물의 중간에 공간이 생겨 물과 물을 구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창공을 만드시고…"

이런 매끄러운 번역에서 '궁창'(하늘)등 한문투의 단어들이 모두 사라졌다. '독처'는 '사람이 혼자서 사는 것'으로,'화염검'(하나님이 나타날 때 칼의 형상으로 나타난 모습)은 '불꽃이 튀기는 칼'로 매끄럽게 옮겼다. 여호와를 지칭할 때는 '하나님'으로, 유대민족 이외의 잡신들은 '하느님'으로 구분한 것도 주목할 만한 시도다.

최 박사는 이름난 구약 학자. 1956년 미국 풀러 신학대를 졸업한 뒤 '공동번역 성경' 번역에도 참여한 노하우가 있다. 4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번 기회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번역을 놓고 장신대 민경배 총장은 "구약성경의 숨결이 피부 가까이 다가오는 체감을 했다"고 밝혔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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