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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모니터에 둥지 튼 지식, 안녕하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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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디지털 시대, 지식이 달라지고 있다. 지식의 매개체인 책도 변하고 있다. 종이책에 깨알 같이 박힌 활자만 지식이요, 책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수많은 블로그의 잡학도 어엿한 지식으로 포장된다. 독서의 영역도 책에서 사이버 공간으로 확장 중이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가벼운 정보'가 아닌 '묵중한 천착'으로서의 학문을 걱정한다. 그 명과 암을 살펴본다. 박정호 기자

너는 책을 읽니, 나는 검색한다

명지대 경영학과 김동휘씨는 인터넷 서점 북토피아에서 최근 드라마로 선보인 '서동요'의 소설을 휴대전화로 내려받아 읽었다. 지하철에서 읽으니 시간을 절약하고 교양도 넓힐 수 있었다.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 나았다. 또 그는 한 달 평균 5~6권의 전자책을 사서 컴퓨터로 읽는다. 값이 종이책의 절반도 안돼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그가 e-북과 인연을 맺은 건 북토피아의 '본문 검색'이 계기가 됐다. 리포트 자료를 찾다가 인터넷에서 일부나마 필요한 대목이 담긴 책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e-북을 구입해 리포트에 참고했다. 이젠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읽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도 북토피아의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서비스 시작을 계기로 종이책 판매 또한 급증했다. 한 달 평균 1억원에 그쳤던 책 판매가 요즘은 하루 평균 1억원으로 늘었다. 네이버의 채선주 실장은 "본문 검색은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는 것과 같다"며 "키워드 하나로 여러 책을 동시에 비교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교보문고도 내년 1월부터 3만여 권의 본문을 제공한다. 책 내용을 확인하려고 서점까지 발품을 팔 필요가 줄어든 셈이다. 온.오프라인의 행복한 만남이다.

전자책은 계속 커갈 것이다. 책도 모바일의 대세를 비켜갈 수 없다. 하지만 아직은 콘텐트가 풍부하지 않다. 무협소설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가 주류다. 인터넷 서점의 가격 할인경쟁도 출판계에 악재다. 책도 구두처럼 정가 내고 사면 바보 소리를 듣는 상황마저 올 수 있다.(김영범.북새통 대표)

언제 수많은 책을? 알짜만 찍어 읽지

'검색형 독서'는 베스트셀러의 지형도를 바꿔놓고 있다. 호흡이 짧고, 실용성이 뚜렷한 책이 인기다. 현재 90만 부가 팔린 '살아 있는 동안 꼭해야 할 49가지'(탄줘잉 편저)가 그렇다. 사랑.향수.부모 등에 대한 얘기를 모았으나 감성적 어휘를 배제하고 핵심 메시지를 직접 전달한 게 주효했다. TV 오락프로를 종이에 옮긴 '스펀지'도 지면을 인터넷 화면처럼 꾸미고, 엉뚱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3권까지 나왔다. 미국에서도 인체에 관한 자잘한 상식을 모은 '왜 남자도 젖꼭지가 있나(Why Do Men Have Nipples)'가 히트했다.

인문.경제 분야에서도 지식 축약형 서적이 유행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책들의 '골수'를 간추리고, 또 저자 자신의 해석을 곁들인 것들이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신영복 지음), '고전읽기의 즐거움'(강희맹 등), '책으로 읽는 21세기'(김호기 등),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박기찬 외), 'CEO의 책꽂이'(톰 버틀러 보던), 'Book+ing 책과 만나다'(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죽비소리'(정민) 등이다.

히트 블로거들도 저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올 4월 출간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박경철)은 별다른 마케팅 없이도 곧 2편을 내놓으며, '러브레터 읽어주는 남자'(이상국)도 베스트셀러에 들었다. 신간 'Life is Good: 문희의 그림일기'(강문희), '야옹이의 두근두근 연애요리'(김민희)의 모태도 블로그다. 지식의 대중화가 가팔라졌다는 증거다.

최근 인문학 분야에서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책들이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학계의 역량은 되레 후퇴했다. 교수들에게 하나의 주제를 긴 호흡으로 써 달라고 부탁하면 대부분 주저한다. 실제로 눈에 띄는 국내 철학책을 꼽기가 어렵다. 교양도 좋지만 학계의 온축이 없으면 사상누각이다. (이승우.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사진도, 댓글도 글쓰기가 될 수 있다?

지식 자체보다 지식의 중개가 키워드로 떠오른 시대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핵심 지식을 읽기 편하게 제공해야 하며, 각주가 줄줄이 붙은 학술적 글쓰기는 속도전 사회에서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휴대전화로 찍어 블로그에 옮긴 사진 한 장, 인터넷에 실린 댓글도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이 될 수 있는 것. 실제로 일본에선 인터넷 댓글을 모은 '전차남'이 100만 부 이상 팔리기도 했다.

국제문제 전문가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 시대의 지구촌을 조망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옛날 이야기꾼'을 거론했다. 세상을 다원적으로 보되, 그 복잡한 현실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히트한 '10년 후 한국'(공병호), '2010 대한민국 트렌드'(LG경제연구원) 등도 이런 글쓰기가 적중한 사례다. 저자의 경험이 듬뿍 들어간 1인칭, 구어체 글쓰기도 주목된다. '자기설득 파워'(백지연),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한비야),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이승복) 의 성공도 체제보다 개인이 부각되는 디지털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스티븐 코비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에서 강조한 것도 '나만의 목소리'다.

잡식과 지식은 다르다. 검증이 부족한 정보를 교양으로 포장하는 편집자들의 반성이 요구된다. 최소한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지식 도둑질'도 사라져야 한다. 감성적 글쓰기 역시 경계 대상이다. 주관이 강하다고 지식은 아니다. 후배 편집자에게 '인터넷은 거짓말쟁이'라고 강조한다. (장은수.황금가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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