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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와 선악, 생사의 장벽 넘는 자유정신의 화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964년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이 제작한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 조르바 역을 맡은 안소니 퀸(왼쪽)과 화자 버질 역할을 맡은 앨런 베이츠가 크레타의 해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다.

육체와 영혼, 구체와 추상, 지상과 심해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방랑. 그 여정에서 만난 이들이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다. 앞의 세 사람은 인류 지성사의 별들이며, 조르바는 오직 카잔차키스에 의해서만 인류의 무대에 출현한 ‘운석’같은 존재다. 그 운석에 대한 탐사의 여정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함께 크레타의 갈탄광으로 가자는 ‘나(작중화자)’의 제안에 조르바는 선뜻 동의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이윤기 옮김, 열린책들)의 서두를 장식하는 명대사다. 인간은 자유다! 이것이 조르바의 사상이다.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보통은 이렇게들 말한다.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고. 그리고 그 자유는 세부적으로 나누어 진다. 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 집단적 자유, 개인적 자유 등등. 조르바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자유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와 동의어라는 것. 즉, 인간과 자유 사이에는 한치의 간극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조르바는 대체 어떻게 이런 사상을 체득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사상적 편력과 방황을 거치면서도 도달하지 못한 그 경지를. 조르바에겐 뭔가 다른 길이 있다! 이제 ‘나’는 조르바를 통해 그 길을 탐사할 것이다. 그것은 폭풍과 고요가 공존하는 ‘존재의 심연’으로의 머나먼 항해가 될 것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고 이윤기 씨가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니코스 카잔차기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출생, 1957년 독일의 한 병원에서 사망.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몰 정보다. 이 연대기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먼저,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동서양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시대를 살았다. 거기다 크레타는 당시 터키령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피터지게 싸우는 장소였던 것. 다른 한편, 20세기가 되면서 세계를 뒤흔든 두 번의 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 전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진영으로 양분된다. 하나의 장벽이 무너지기도 전에 또 다른 장벽들이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장벽들 사이를 치열하게, 가뿐하게 넘나든다. 젊은 날엔 그리스 전역을 종단하고 이후 그의 발길은 유럽에서 러시아, 중국, 일본까지 미친다. 동시에 시대가 부여하는 실천의 현장에도 기꺼이 투신한다. 크레타 해방운동에서 파시즘과의 전투를 거쳐 공산주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런가 하면 구도적 열정 또한 드높아서 가톨릭 수도사가 되고자 했으면서도 붓다와의 대결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 그가 이 무수한 경계을 종횡하면서 피워낸 꽃은 무엇일까?

<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여행이 지상의 길을 탐사하는 것이라면, 꿈은 존재의 심연에 대한 탐사다. 여기서도 그는 경계인이다. 육체와 영혼, 구체와 추상, 지상과 심해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여정에서 만난 이들이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다. 앞의 세 사람은 인류 지성사의 별들이다. 그럼 조르바는? 실존인물이지만 무명의 존재다. 오직 카잔차키스에 의해서만 인류의 무대에 출현한 ‘운석’ 같은 존재다. 그 운석에 대한 탐사의 여정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그런데 그게 여행기야?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여행기란 무릇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조르바라는 특별한 존재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여행기란 말인가? 맞다. 헌데, 나는 처음부터 이 작품을 여행기로 간주해버렸다. 생각해보니 좀 야릇 하기도 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분명 <서유기>나 <돈키호테><허클베리 핀의 모험>처럼 지도가 분명한 여행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애초 ‘로드클래식’을 구상할 때부터 이 작품을 ‘히든카드’처럼 손에 쥐고 있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먼저 작품의 화자인 ‘나’와 조르바는 모두 길 위에 있다. 둘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나’도 기나긴 여행 중이었고, 조르바는 ‘본투비’ 떠돌이다. 둘은 크레타로 가는 항구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둘은 만나서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다시 헤어진다. 헤어진 다음에도 둘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머무름 없는 존재들의 마주침, 이것이 이 작품을 여행기로 간주(혹은 상상)한 이유다.

둘은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에 대한 탐사에 들어간다. ‘나’는 조르바에 대하여, 조르바는 ‘나’(조르바는 나를 ‘두목’이라 부른다)에 대하여. 동시에 둘은 끝없이 묻고 또 묻는다. 음식에 대하여. 산투르와 갱도에 대하여. 여성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조국에 대하여. 또 죽음에 대하여. 요컨대 존재와 우주의 모든것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여행이 아닐까. 일찍이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바 ‘앉아서 유목하기’가 이런 것일 터이다. 진정한 노마드(유목민)는 말 위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이 곧 길이므로. 길이 곧 삶이고 운명이므로.

대지의 사나이, 조르바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오른쪽)는 버질에게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작품의 첫 구절이다. 30대 중반인 ‘나’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 절친한 친구와 헤어진 직후였다. 친구는 카프카스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을 구하러 떠났다. ‘나’를 향해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사는 책벌레라고 비난과 연민을 보내면서.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를 크레타로 향하게 만들었다. 폐광이 된 갈탄광을 빌려 노동자, 농민들과 살아보기 위해서다. 생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부대끼고 싶어서다.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한 것이라던가. 그 길에 들어서자마자 조르바를 만났다.

조르바는 60대 중반의 광부였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밝고 예리했다.” 산투르라는 악기의 명인이자 인정물태에 통달한 인물. ‘나’는 즉각 알아차렸다. 조르바는 ‘내’가 당면한 이분법, 이론이냐 실천이냐 조국이냐 진리냐는 질문을 훌쩍 뛰어넘은 존재라는 것을. 그에게는 오직! 삶이 있을 뿐이다. 그 삶은 대지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면서 언제든 하늘을 향해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22쪽)

사주명리학은 태어난 연월일시를 통해 한 사람의 운명의 지도를 그리는 아주 오래된 동양의 지혜다. 그런데 그 운명의 리듬에서 첫 번째 스텝이 ‘식상’이란 영역이다. 밥, 말, 성욕 혹은 끼(재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언어능력과 식욕과 성욕이 같은 라인이라고? 그렇다. 물리적 차원에선 동일한 벡터를 지닌 셈이다. 조르바가 바로 그런 존재다. 조르바의 신체적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푸짐한 입’이다. 그 입으로 쉬지 않고 먹고 마시고 떠들어댄다. 그리고 언제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 금욕과 사색에 찌든 ‘나’에게 조르바는 이렇게 충고한다.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거라고요.”(52쪽) 에로스의 원천도 바로 거기다. 조르바는 크레타 섬에 도착하자마자 과부이자 호텔 주인인 오르탕스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쾌락과 소유에 함몰되지 않는다. 요즘 말로 하면 왕성한 ‘케미’를 자랑한다. “우리 옆에 앉은 여자는 시시각각으로 젊어졌다.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지기 시작했다.”(57쪽)

이것이 생명의 원리다. 먹고 마시고 욕망하기. 그리고 말하기. 조르바의 말처럼 먹는다는 건 매일매일의 의식이다.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덕분에 ‘두목’은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99쪽) 말씀이 곧 육신이 되는, 로고스가 곧 일용한 양식이 되는 이치를 목격한 것이다. 이 순간 영혼과 육체는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동시에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것들을 가볍게 관통하면서 매끄럽게 연결한다. 음식과 철학, 노동과 영성. 인간과 자연 등등.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니다.”(101쪽) 그럼 조르바 당신은? 두 번째에 속하는 인간이란다. 맞다. 음식이 조르바의 오장육부를 거치면 ‘노동과 유머, 그리고 사랑’이 된다.

에로스의 향연 ―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보다시피 조르바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지도 억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맘껏 향유하고 즐긴다. 나아가 그것을 삶의 동력으로 적극 활용한다. 그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주창한 ‘생산하는 욕망’, ‘욕망하는 생산’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도 주야장천(晝夜長川) 먹어대고 오직 원하는 건 연애와 섹스뿐인데 왜 조르바가 될 수 없는 걸까? 간단하다. 욕망과 쾌락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쾌락은 ‘생산이 멈춘 욕망’이다. 욕망이 창조와 생산의 라인을 벗어나는 순간 삶은 쾌락에 종속당한다. 조르바의 위대함은 욕망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되 결코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그만의 독특한 노하우가 있다.

어릴 적 버찌에 빠진 적이 있었다. 자나깨나 버찌 생각으로 미쳐버릴 지경이 되자 조르바는 아버지 주머니를 뒤져 은화 한 닢을 꼬불쳐 시장으로 달려간다. 버찌 한 소쿠리를 사서는 도랑에 숨어서 먹기 시작했다. 먹고 또 먹고… 토할 때까지 쉬지 않고 먹어댔다. 그러고 나선 끝! 그날부터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담배나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지만 언제든 끊을 수 있다.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고향도 마찬가지예요. 한때 몹시 그리워하던 적이 있어서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버렸지요. 그때부터 고향 생각이 날 괴롭히는 일이 없어요.” (284쪽) 이것이 그가 욕망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도 결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기술이다.

그는 말한다. 이런 자유는 금욕주의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욕망은 삶의 원초적 토대다. 그것이 없이는 삶을 추동할 엔진이 사라진다. 그 엔진은 늘 활기차게 돌려야 한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문득 그 맛에 도취되고 마침내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숙명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집단에선 금욕을 강조한다. 욕망 자체를 금지하고 부정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단코 성공할 수 없다. 조르바와 두목이 찾아간 수도원이 바로 그 증거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한다고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그곳을 움직이는 건 돈과 동성애, 그리고 치정살인 등이다. 금욕주의가 낳은 부작용은 이렇듯 끔찍하다. 그래서 조르바는 금욕주의를 믿지 않는다. 설령 성공한다 한들 거기에서 무슨 생의 도약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면으로 맞짱을 뜨는 것이다. 즐기거나 토하거나! 그는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나갔다. 도자기를 만들 때였다. 녹로를 돌리는데 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면서 자기가 만들려던 걸 뭉개곤 했다. 그래서 손도끼로 잘라버린 것이다. 이건 또 무슨 기행인가? 역시 마찬가지다. 뭔가를 창조할 때는 끝까지 간다! 그것을 가로막는 건 자신의 신체 일지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나면 욕망은 스스로 멈춘다.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조르바의 전략이다. 그럼 여자는?

그에게 여자란 ‘무서운 수수께끼’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 듯이 떠들어댄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가 보기에 여자란 토라지기 잘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누가, 사랑한다, 갖고 싶다고 하면 웃음을 터뜨린다. 자기가 원하건 안 원하건 상관없다. 해서 일단 여자를 만나면 남자는 무조건 ‘갖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여자란 가엾게도 그걸 원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누군가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욕망하기를 욕망하는 존재다. 천 번을 깔려도 처녀로 다시 일어서는 존재. 심하게는 “젖통만 쥐어 주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들어버리는 이 가엾은 것들”이다. 그래서 조르바는 다시 묻는다. “여자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요?”

여자란 무엇인가?―암컷 혹은 아프로디테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크레타 섬에서 만난 과부 오르탕스 부인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물론 결혼을 한다고 그 비밀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결혼이란 ‘일생일대의 실수’다. 여자에 대해 알 수 있기는커녕 더더욱 미궁에 빠질 따름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조르바는 길 위에 나섰다. 젊은 날엔 가위를 들고 다니면서 자신과 관계한 여성들의 ‘치모’를 수집하여 베개를 만들어 베고 자기도 했다. 그러다 그것도 심드렁해져서 다 태워버리고 동시에 가위도 버렸다. 이쯤 되면 변태에 마초로 찍히기 딱 좋다. 하지만 여자에 대한 그의 탐구는 결코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그는 여성을 쾌락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쾌락이라고 여겼으면 버찌나 담배에 대해서처럼 토할 때까지 해보고 끝냈을 것이다. 그는 여자를 진짜! 사랑한다. 그 사랑은 소유욕이나 성욕 따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에게 사랑이란 여자 안에 있는 깊은 샘물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크레타 섬에서 만난 과부 오르탕스 부인은 퇴물 카바레 가수다. 조르바는 그녀가 자신의 황금시대를 추억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드러난 그녀의 화려한 이력. “나는 제독을 사랑했지요. 크레타에 또 한 번 혁명이 있자 열강의 함대가 수다 항에 닻을 내렸어요. 영국 제독, 프랑스 제독, 이탈리아 제독, 러시아 제독이…. 나는 제독들의 수염에 매달려 불쌍한 크레타 사람들을 폭격하지 말아달라고 졸랐어요.”

자신도 평화를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크레타가 자유를 찾는 날이 오고 말았다. 열강의 함대는 이제 떠나야 한다. 덕분에 그녀는 “한꺼번에 서방 넷을 잃고 곱빼기에 곱빼기 과부가” 된 것이다. 제독들은 그녀에게 영국과 이탈리아 파운드, 프랑스 나폴레옹 화폐, 러시아 루블을 잔뜩 집어 주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회고담. “욕탕에다 샴페인을 가득 채우더니 날 거기에다 집어넣더군요. 그러고는 날 위로하는 뜻에서 그 샴페인을 퍼 마시더군요. 술에 취하자 제독들은 불을 껐어요. 아침이 되어 일어나 보니 내 몸에서는 네 가지 향수 냄새가 골고루 나는 거예요. 네 강대국을 나는 바로 이 무릎 위에다 올려 놓고 이렇게 이렇게 데리고 논 거예요.“(63쪽) 4대 열강을 ‘들었다 놨다’ 한 그 시절이 그녀에겐 생의 절정 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이면 혹은 미시사를 장식하는 이런 이야기를 조르바가 아니라면 어떻게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순간 조르바는 후끈 달아오른다. 이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암컷’이었다. 젊든 늙든, 아름답든 추하든 용모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여자 뒤에는 위엄 있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조르바가 보고 말하고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얼굴이었다. “오르탕스 부인은 덧없는 순간의 투명한 가면에 지나지 않았고 조르바는 이 가면을 찢고 영원한 입술에 키스하는 것이었다.”(64쪽) 암컷이라고 하면 여성들은 대개 모욕감을 느낀다. 하지만 조르바에겐 그것이 곧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다. 미추와 노소 빈부 등 문명적 가면들이 다 벗겨진 여자의 원초적 ‘쌩얼’이기 때문이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보도록 해주는 것. 자신에게 매달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게 해주는 것. 이것이 조르바의 ‘사랑법’이다. 하여, 오르탕스 부인에게 있어 조르바는 터키인이자 유럽인이자 그리스인이다. “조르바를 안음으로써 오르탕스 부인은 축복받은 저 수많은 애인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셈이었다.” (231쪽)

솔직히 이런 사랑법은 참으로 낯설다. 우리 시대는 서로를 향해 블랙홀처럼 달려가는 것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한다. 사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소유나 소비에 가깝다. 그래서 결국은 스토킹 아니면 포르노로 떨어지고 만다. 생산과 창조로부터 멀어질때 사랑은 순식간에 폭력이 된다는 것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또 그럴수록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알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에서만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아니 인간!

조르바는 자부한다. 오르탕스 부인을 나보다 더 기쁘게 해준 사람은 없다고. “다른 사람은 그 여자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이나, 크레타나, 훈장이나, 마누라나, 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건 깡그리 잊어버립니다.”(391쪽) 왜? 오직 그녀에게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조르바가 보기에 여자들은 이런 사랑에 부응하지 않는다. 오르탕스 부인만 해도 사랑에 빠지자마자 곧바로 결혼을 열망하지 않던가. “저 원대한 희망(결혼)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며 빛을 발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늙은 세이렌은 매력을 깡그리 상실한 것이었다.”(305쪽) 그저 결혼하고 싶어하는 가련한 여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

그래서 조르바는 다시금 불가사의하다. 대체 여자는 왜 자유를 원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여자도 인간인가? 그는 정말로 그것을 알고 싶다. 오랜 탐구를 통해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여자도 인간이다. 다만 약자일 뿐이다. 약한 자는 자유를 누리기를 두려워한다. 누군가에게 예속되고 보호받고 싶어한다. 게다가 지갑을 보면 돌아버린다. 착 달라붙어 자유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모조리 남자에게 주어버린다.

해서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윤리적 지침이 있다. 여자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 또 여자와 잘 수 있는데도 함께 자주지 않으면 영혼이 파멸을 면치 못한다는 것. 왜냐면, 그럴 경우, 여자는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도 한숨을 쉴 거고, 아무리 잘한 일이 많아도 그 한숨 하나면 그 사내는 지옥행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마을의 과수댁이 혼자 잔다는 게 그로서는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밤마다 그 집 뜰을 방황한다. 누가 그녀와 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란다. 헐~ 이런 대책없는 ‘박애주의자’를 봤나!

이렇듯 그에게 있어 여자란 존재의 심연을 탐사하는 일종의 키워드다. 작품 안에는 두 가지 죽음이 등장한다. 하나는 마을의 ‘팜므파탈’인 과수댁. 모든 남자를 들뜨게 만드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조르바와 두목 역시 그녀에게 매료된다. 하지만 이 매력이 그녀를 엄청난 비극으로 빠뜨린다. 한 청년이 그녀를 짝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어버린 것. 그러자 가족과 마을사람들은 그녀 탓이라 간주하여 증오심에 들끓는다. 결국 부활절 축제마당에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며 죽이라고 아우성친다. 조르바는 그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죽은 청년의 아비가 나타나 민첩한 매처럼 과수댁을 덮쳐 단도로 목줄을 따버린다. 부활절의 잔혹한 살육!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이것이 군중, 아니 인간이다. 여자보다 더 약한 인간의 모습! 조르바는 절망한다. 그 뒤를 이어서 오르탕스 부인 또한 폐렴에 걸려 임종을 맞이한다. 이웃들은 그녀가 죽기도 전에 그녀의 물건들을 약탈하는 데 급급하다. 그 소동 속에서도 조르바는 끝까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준다.

두 여자의 죽음을 목격한 뒤 그는 깊은 정적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385쪽)

곡갱이와 산투르, 그리고 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두 여인의 참혹하고 허무한 죽음을 목도하며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라고 절규하는 조르바.(가운데 총 든 이)

왜 먹는가? 노동하고 유머를 구사하기 위해서. 왜 섹스하는가? 생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조르바는 그런 인물이다. 그의 식욕은 말로, 노동으로 순환한다. 또 그의 사랑은 여자를 넘어 존재의 심연으로 향한다. 처음 두목과 만날 때 그의 옆구리에는 보따리 하나가 있었다. 산투르라는 악기를 싼 보자기. 산투르는 그의 화신이다. 그는 그것을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양 소중히 다루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대화를나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범신론자다. “만물에 영혼이 있는 것 같은 것이… 나무도, 돌도,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도, 밟고 선 이 대지도, 두목, 모든 사물, 그래요, 글자 그대로 만물입니다!”(115쪽)

나무와 돌뿐 아니라 탄광과도 혼연일체다. “조르바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갱도를 자기 살 속에 뚫린 혈관으로 느낄 수 있었고 검은 석탄 덩어리들도 느껴내지 못하는 것들을 살아 있는 인간의 투명한 의식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160쪽) 나무는 갈탄이 되고, 갈탄은 석탄이 되고, 또 조르바가 된다. 말하자면 조르바는 대지와 곡괭이와 갈탄에 호흡을 일치시키는 존재다. 갱도가 벌어져 무너지려 할 때 그걸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도 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건만 그는 사람들을 다 구출시키고 맨 나중에 빠져나온다. 죽음 앞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내공. 그것은 그가 여자를 사랑할 때처럼 일과 광산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채 밝기도 전에 광산의 갱도에서는 조르바의 고함 소리와 곡괭이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인부들을 취하게했다. 그의 손에서는 대지는 생명을 되찾았고 돌과 석탄과 나무와 인부들은 그의 리듬으로 빨려 들어갔다.”(262쪽)

먹을 때는 먹는 것만, 일할 때는 일만, 사랑할 때는 사랑만! 이것이 그의 신념이자 철의 규율이다. 순간에 충실하라! 인류의 모든 멘토가 전하는 메시지다. 삶은 어제도 내일도 없다. 오직 ‘지금, 여기’가 있을 뿐! 이것은 쾌락주의나 향락주의가 아니다. 쾌락과 향락, 고통과 괴로움의 경계가 사라져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391쪽)

만물과 리듬을 타고 순간의 강밀도를 즐기고. 춤이 생성되는 지점도 바로 거기다. 춤은 사물과 우주와 소통하는 몸짓이다. 러시아에서 살 땐 볼셰비키 친구와 춤으로 살아온 내력을 다 표현한 적도 있다. 말을 더 크게 하면 춤이 된다. “내 발, 내 손이 말을 했고, 내 머리카락, 내 옷도 말을 했지요.”(110쪽) 몸 전체가 로고스가 되는 과정, 그것이 곧 춤이다. 그러기 위해선 신체가 활짝 열려야 한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시비와 선악, 생사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조르바의 몸은 상처와 흉터와 옹이투성이다. 크레타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총을 들었고 아무 이유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난도질하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다. 조국과 하느님, 그것이 그의 존재를 지배한 지고의 이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정규 전투요원이 되어 불가리아인의 목을 땄는데, 그 다음날 거리에서 그 사람의 아이들을 만났다. 가진 것을 다 털어준 다음, 셔츠 앞을 헤쳐 애써 땋은 성 소피아 성당 장식을 떼어내어 갈기갈기 찢어발기고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이로써 나는 구제를 받은 겁니다.” “내 조국으로부터 구제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제받고, 돈으로부터 구제받았습니다.” 비로소 ‘해탈의 길’, ‘인간의 길’을 찾은 것이다.

‘조국과 하느님’으로부터의 도주

그가 보기에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느님과 돈도 마찬가지다. 부활절 축제마당에서 아무 죄도 없는 과수댁의 목을 따고 오르탕스 부인이 죽기도 전에 물건을 약탈하는 존재들, 그것이 인간이다. 그 끔찍하고 비열한 짓거리도 다 신의 이름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전장을 누비면서 그 모순과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터득한 셈이다. 해서 죽도록 도망치고 있다. 조국이나 신,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이상으로부터. 쾌락과 이상은 정반대편에 있지만 인간을 예속시키고 광적인 열기에 휩싸이게 하는 건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도주하지 않는 한 자유는 없다!

하여,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오직 조르바 자신만을 믿는다. 그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82쪽) 하지만 그렇게 경멸하고 의심하면서도 그는 언제나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대신 그는 인간의 어떤 꼬라지도 외면하지 않는다. 아무리 끔찍해도, 아무리 비열해도, 아무리 나약해도. 그러면서 하나씩 벽을 넘어왔다. 그에겐 어떤 이상도 없다. 조국도 신도 결혼도 고향도. 동시에 그에게는 그것들이 주는 두려움 또한 없다. 비로소 만물과 더불어 춤출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목과 조르바가 시도한 회심의 사업은 마침내 파국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헌데 놀랍게도 파산과 더불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비움으로써 얻어지는 해방의 공간! 조르바는 고백한다. “두목!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마치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 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416쪽)

조르바의 죽음은 장엄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다. 거기에서 창틀을 거머쥐고 먼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다.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 마치 선사들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좌탈입망! 보통 선사들은 좌탈(앉은 채로 숨을 거두는 것)을 하는데, 조르바는 입망(선 채로 숨을 거둠)을 한 것이다.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심해를 항해하고 돌아온 고래의 충혈된 눈! 카잔차키스의 또 다른 멘토인 니체의 말이다.

자, 여기까지가 조르바의 여정이자 항해다. 그럼 조르바가 그토록 사랑한 ‘나’는? 그는 이 길 위에서 어떤 심해를 탐사한 것일까? 그건 다음호에서.

고미숙 -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에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두 개의 별 두 지도><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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