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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종북논란 자체정화 못 해 진보정치 위기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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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으로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원내 세력은 정의당만 남게 됐다. 5석의 의석을 가진 미니 정당이다. 2012년 경선 부정 사태를 겪으면서 통진당에서 떨어져 나온 뒤 당세가 크게 위축됐다. 연말 정국을 달궜던 통진당의 종북 논란과 해산 결정을 뒤로 하고 정의당은 새해 첫 대외 일정으로 백령도 해병대 부대를 방문하고 천안함 위령탑을 참배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간 진보정당에선 쉽게 볼 수 없던 장면이다.

 파격 행보를 이끈 것은 심상정(재선·고양 덕양갑) 원내대표다. 그는 “진보정당이 안보나 국방에 대한 책임이 부족한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는 데 대해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공개적으로 자성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 저녁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뤄진 심 원내대표와의 인터뷰는 2시간가량 이어졌다.

심상정 원내대표는 “진보의 위기는 1980년대 운동권을 주도했던 NL·PD의 연고주의와 낡은 질서를 단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경빈 기자]

 - 진보정당의 천안함 위령탑 참배는 낯설다.

 “익숙한 모습은 아니겠지만 국방이나 공익을 위해서 애쓰는 분들을 위로하는 건 공당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분단 70년, 광복 70년을 맞아 분단의 역사 속에서 대립과 갈등이 첨예한, 가장 아픈 곳이 서해 북단이라고 보고 장병을 위로하고 천안함 영령들도 경배하면서 우리의 각오도 다지자는 취지였다.”

 - 진보진영은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 발표를 부인해 왔다.

 “정의당은 정부의 조사 결과가 틀렸다든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정부 조사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상태에서 야당이 참여하는 초당적 진상조사 요구를 무시한 걸 문제 삼은 것이다. 조사의 허점을 지적하는 문제는 이념의 문제도,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도 아니다. 그건 과학의 문제이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을 어떻게 보나.

 “헌재에 의한 최초의 정당해산이 이뤄진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적 오점이다. 좌파든 우파든 어떤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유권자들의 평결에 의해 이를 주변화시켜 나갈 때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숙된 자산으로 남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 (이석기 전 의원 등) 통진당 사람들의 재판이 진행 중인데 헌재가 나서서 정당해산 결정을 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다.”

 - 통진당의 종북성이 문제가 됐다.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저는 2008년 (민주노동당) 비상 당대표를 맡았을 때부터 여러 차례 이 문제에 대해 내부 혁신에 앞장섰지만 실패했고, 이후 나이브한 판단으로 통합이 이뤄지고 결국은 또 결별하는 과정을 겪었다. 10여 년간 종북 문제에 휘말려 진보정당이 본연의 목표로 매진할 수 없었던 점에 대해선 뼈아픈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와 천호선 대표 등 지도부가 지난 7일 백령도 천안함 위령탑을 참배하고 추모 조형물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종북 세력을 둘러싼 진보진영 내부의 뿌리깊은 갈등이 표면화된 계기는 일심회 사건(2006년)이다. 민노당 인사 등 5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북측에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 행위를 한 게 국가정보원에 의해 드러났다. 2008년 당시 민노당 심상정 비상대책위원장은 임시 당대회를 열어 이 사건에 연루된 당원 2명에 대한 제명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자주파(NL)가 주도권을 쥐면서 부결됐다. 이에 반발한 심 위원장, 노회찬 전 의원 등 민중민주파(PD)가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든다. 19대 총선을 앞둔 2011년 심 원내대표는 이정희(민노당계)·유시민(국민참여당계) 전 의원 등과 함께 다시 통합진보당을 창당하지만 이듬해 경선 부정 사건이 불거지면서 결별한다.

 - 종북 문제로 갈라섰던 세력과 다시 손을 잡은 건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 사상적인 문제나 비공개 활동까지를 다 파악하긴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이브하다고 말하는 거다.”

 - 통진당 해산은 진보의 위기인가.

 “어떤 분들은 피해가 있다고 하고, 어떤 분들은 기회가 됐다고 하지만 유불리의 문제로 봐서도 안 된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졌을 때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으로서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10여 년간 종북주의 논란을 내부적으로 정화하지 못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이 안보불안 세력으로 낙인 찍혔고 또 한편으론 진보정당이 원래 하고자 했던 사회적 약자의 희망으로 우뚝 서지 못했다. 뼈아픈 과정이었다.”

 - 진보진영 내부에서 종북 문제를 걸러내지 못해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 이유가 뭘까.

 “과거의 낡은 이념 대결, 80년대 운동권을 주도했던 NL·PD를 중심으로 한 진보 연고주의와 과감하게 단절하지 못한 게 가장 크다. 진보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건 그런 낡은 질서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냉전적인 이념 질서인 색깔론 공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또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양당 중심의 정당체제를 고착화하는 선거제도도 중요한 요인이다.”

 - 정의당의 지향과 이념의 좌표는 어디인가.

 “정의당은 민주주의자·노동운동가·페미니스트·생태평화주의자가 모인 정당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천명했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 정의당식 사민주의의 요체는 뭔가.

 “국가권력이 시장권력을 압도하면 전체주의가 되고 시장권력이 우위에 서면 공동체가 붕괴된다. 제가 생각하는 사민주의 노선은 국가권력과 시장권력과 함께 이것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사회 권력을 만들어 내는 게 핵심이다.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권리가 보장된 사회로 확장되는 것, 다시 말해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꿔 가는 것이다. 지난 2년은 정의당이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었다. 올해는 진보정치의 새로운 원년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각오다. 낡은 이념대결 등 과거로부터 단절해야 할 것들은 단절하고, 계승해야 할 것을 분명히 하면서 정의당의 체력을 단단하게 만들어 나가겠다. 그걸 바탕으로 진보 재편과 야권 혁신의 길로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 계승할 것은 뭔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걸고 흔들림 없이 헌신해 왔다는 자긍심이다. 기자들도 우스갯소리로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의 중점적인 공약들은 대부분 민주노동당이 출처라는 얘기를 할 정도로, 진보정당이 추구해온 가치가 보편화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우리가 추구해 왔던 길이 시대정신이었다는 자긍심과 비전이 간과돼선 안 된다.”

 - 진보가 미래를 얘기하지 않고 과거에 집착하는 건 무능하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민노당 당시 10명의 의원은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최고 우수한 정책역량들이 결집했다. 중앙당에 정책파트만 100여 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의 체력이 많이 약화됐다. 유능한 정책 역량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할 생각이다. 잘 벼려진 정책을 가지고 시민들과 소통하며 사회경제적 민주화 주체를 형성하는 데 매진해 나가겠다. 뚜렷한 비전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책,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 진보정당의 미래가 있다.”

 - 5석으론 한계가 있지 않나.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과의 관계 설정은.

 “E H 카가 얘기한 것처럼 야당은 대안권력이다. 여당이 잘못하면 야당의 지지율이 올라가야 하는데 지금 야당은 더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정치연합과 정의당은 그런 질책에 응답해야 하고 혁신경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양당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아니라 야권 혁신에 대한 열망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를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

 - 진보신당 논의가 진행 중인데.

 “제3의 대안세력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에 대한 움직임이라고 본다. 사실 제3의 대안세력을 자임하고 출발한 것이 진보정당인데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국민의 기대 밖으로 밀려났던 게 사실이다. 정의당이 커져 가는 대안세력에 대한 열망의 한복판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인터뷰 도중 의원회관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 액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달라이라마 등 외국의 지도자들과 기념 촬영한 것들이다. 심 원내대표는 “시진핑 주석과는 세 차례나 만났는데 정작 박근혜 대통령과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오는 12일 신년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는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 박 대통령이 잘한 것과 잘못한 일을 꼽으라면.

 “가장 잘못한 건 인사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순탄하게 닦은 건 평가할 만하다.”

 - 박 대통령을 만난다면 무엇을 건의할 건가.

 “통합의 정치를 말하고 싶다. 특히 남북관계는 초당적 협력, 국민 통합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국민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국회와의 거리를 좀 바짝 좁혀 주실 것을 요구하겠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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