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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7)8기생과「6·25」-제79화 육사졸업생들(13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8기가 소위계급장을 달고 쏟아져 나오자 그 수가 하도 많아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8기생 중 l명이 맞는다』는 말이 얘기될 정도였다.
당시까지도 장교가 모자라 하사관들이 소대장을 맡고있는 부대가 많았는데 8기의 배출로 소대장 요원은 대부분 장교로 충원될 수 있었다.
졸업때 l등에서 15등까지를 우등생이라 하여 똑같은 훈장을 주었다.
그들 중 기억이 나는 사람은 강중수(중령예편·경리출신·전 한전강원지점장) 이병희(57·경기 용인·국희의원·무임소장관) 이영근(59·평북 정주·전 유정회원내총무) 서정순(58·서울·전 행개위원장) 김종필(57·충남 부여·전 국무총리) 표대현(중령예편·전 조폐공사이사) 정순갑(중령예편)씨 등이 있다.
졸업당시 누가 1등이냐를 놓고 조그마한 촌극이 하나 있었다.
졸업을 이틀 앞둔 토요일, 당시 2중대에는 자기중대에서 1등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 알아보니 이영근생도였다. 그래서 헹가래를 쳐주기까지 했는데 막상 졸업식장에서는 1등이 이헌영생도로 바뀌어 어안이 벙벙했다는 것이다.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두사람 이름이 비슷한 점도 있고 그 당시만 해도 사관학교 행정이 체계가 안잡혀 있었는데다가 지금처럼 1등은 대통령상 등 순서에 따라 상을 주지 않아 그런대로 넘어갔다는 얘기가 있다.
1등으로 졸업한 이헌영소위는 사관학교 교장 부관으로 남아 있으면서 6·25가 발발하자 6월27일 사관생도를 이끌고 서울방위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다.
육본에 배치 받은 15명의 8기생들은 동기생들에 앞서 임관2개월만에 중위로 승진했다.
전투부대에 배치 받은 8기생들은 일선소대장으로 6·25발발 전에 이미 옹진전투, 혹은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실전경험을 했다.
반면 육본이나 후방에 배치받은 동기생들은 참모업무와 군작전계획수립, 혹은 새로 창설되는 부대의 기간요원으로 활약이 컸다.
임관 후 만1년만인 50년5월 우등생을 제외한 나머지 8기생들이 전원 중위로 승진했다. 그러니까 8기생들은 중위 때 6·25를 맞은 셈이다. 일선부대 근무자들은 소대장·중대부관, 혹은 대대참모를 맡고 있을 때였다.
일선소대장을 맡았기 때문에 육사의 어느기 보다 희생이 컸다. 8기생 중 6·25때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이 모두 3백82명으로 총원의 3분의 1에 육박하고 있다.
당시 북괴군은 1등 사수들을 확보하여 국군소대장만 전문적으로 저격하도록 일선부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사관이나 사병은 아무리 얼씬거려도 쏘지 않고 소대장만 노리고 있다가 저격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측 소대장들의 희생이 많았고 그 때문에 『소위는 소모품』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당시 대부분이 맨 앞에 나서서 부대를 진두지휘해야하는 소대장을 맡고 있던 8기생들은 그말을 바꿔 『8기생은 소모품』이라는 자학적인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전사책을 보더라도 8기생이 유공자로 나오는 예는 별로 없다. 그들이 말단 지휘자들이었기 때문에 단독작전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전공은 상급부대 지휘관에게 돌아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투가 끝나면 사단장·연대장·대대장·중대장 이름이 차례로 훈장명부에 올랐으나 8기생 이름은 오르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소외감이 5·16이라는 혁명을 만들어냈다고까지 말하고있다.
사실 나 자신이 6·25발발 당시 육본작전국장으로 있으면서 일선소대장의 무공을 보고 받은 경우가 드물며 혹시 있었다해도 그 당시 소대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8기생의 전투상황을 기록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육본에서 같이 근무하던 유능한 초급장교로서의 8기생들의 기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있던 작전국에 진종채씨(60·경북 영일·대장예편·진해화학사장)가 있었고 정보국에는 이병희·전창희(전 CIA부산분실장) 이희성(59·경남 고성·대장예편) 김진구(소장예편·삼성고문) 서정순·전재덕(전 중정차장)·고제훈(중령예편·대한손해보험협회회장)·김종필 이영근씨 등이 6·25 즈음에 중위로 육본에서 근무했다.
특히 육본 정보국은 당시 육사8기 출신들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모여있었다.
요사이도 6·25때의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간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적 좋은 8기생들이 육본에 많이 와서 선임장교들을 보좌하여 정보를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할 정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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