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질서와 무질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파리의 극장이나 관공서의 민원창구 앞에는 항상 질서정연하게 열 지어 기다리는 시민들의 장사진이 있다. 저녁준비를 앞둔 시간의 슈퍼마키트나 빵집, 푸줏간 앞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얼굴에선 오랜 기다림에서 오는 지친 표정이나 짜증스러움, 초조함을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의 새치기 시비도 물론 없다.
민원창구의 직원이 늑장을 부려도, 푸줏간 주인이 잡담을 하느라 볼일을 늦춰도 군소리를 않는다. 끈질기게 기다리는 장사진이 한 두사람 모인 것처럼 조용한 것도 이상할 정도다. 이런 걸로 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이른바 공공질서나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백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열을 일단 벗어나면 놀랍게도 금새 딴판이 된다. 자기차례가 되면 기다린 만큼 볼일이 길어진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공중전화 걸기가 파리처럼 힘든 곳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송수화기를 들기 전에 우선 주머니 속의 동전을 모두 꺼내놓고(동전만 넣으면 계속 통화가 가능하다) 담배부터 피워 문다. 몇십 분씩 기다린 끝에 차지한 자신의 권리를 만끽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게 시작된 통화는 대충 꺼내놓은 동전이 다할 때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매사가 이런 식이어서 어느 곳에나 장사진이 없을 수 없다. 집단 속에서의 질서 안에 극단의 개인주의가 숨겨져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개인주의가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를 낳기도 한다.
파리시내 자동차운전자들의 무질서한 운전은 세계에서도 으뜸이다. 교통신호가 무시되기 일쑤고 앞선 차가 조금만 머뭇거려도 뒤차의 클랙슨소리가 요란하다. 운전자끼리 삿대질을 하는 시비도 잦다. 보행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횡단보도나 신호등은 있으나 마나이다. 교통신호등 옆에 버티고 선 경찰관 역시 이를 단속할 생각을 전혀 않는 눈치다. 멋대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다치거나 죽거나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을 견주어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독일군은 사단본부가 무너지면 휘하의 연대 대대 중대소대가 삽시간에 오합지졸로 변해 전체가 궤멸되지만 프랑스군은 이와 거꾸로 라고 한다. 사단이 없어지면 연대가, 연대가 쓰러지면 대대가, 대대가 와해되면 중대가, 중대가 해체되면 소대가, 소대가 넘어가면 각개 병사가 더욱더 강해진다.
개개인을 묶어두는 「틀」이 클수록 프랑스인은 약해지고「틀」이 작을수록 강해진다는 얘기도 된다. 개인주의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말도 된다.
프랑스는 집단의 질서와, 무질서로 보이는 개인주의가 용케도 얽혀있는 나라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