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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⑨스포츠] 81. 헝그리 복싱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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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김기수(오른쪽)가 1968년 3월 12일 일본 아카사카의 얼굴에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날리고 있다.

▶ 66년 6월 25일 이탈리아 벤베누티를 꺾고 국내 프로복싱 사상 첫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트로피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

▶ 홍수환이 1977년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파나마의 카라스키야에게 펀치를 날리고 있다. 홍수환은 네 차례 다운당했으나 3회 역전KO승, 4전5기의 신화를 이뤄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달걀 하나면 자신만만

김득구가 ‘붐붐’ 맨시니에게 도전한 WBA라이트급 타이틀매치를 얼마 전 한 케이블 TV에서 재구성해 방송한 일이 있다. 시작 공이 울리면서부터 기선을 제압한 김득구가 적어도 중반까지 경기를 주도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회부터 급격히 무너졌다. 당시 해설을 맡은 필자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김득구가 맨시니처럼 어렸을 때부터 우유와 버터를 먹어 온 선수라면 막판에 저렇게 힘에서 밀렸겠습니까?”

죽음으로까지 몰린 김득구의 패인이 ‘체력의 열세’라고 나는 단정한다. 김득구가 요즘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갑자기 무너질 리 없었을 것이다.

과거 한국의 프로복서들은 잘 먹지 못하고 자랐다. 대부분의 격투기 종목이 그랬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고 운동했던 것이다. 헝그리 복서들은 그렇게 샌드백을 두들기면서 신인왕, 한국챔피언, 동양태평양챔피언을 꿈꿨고 나아가 세계챔피언에도 올랐다.

김득구가 세계챔피언 도전을 한 1980년대 초만 해도 배를 곯는 선수가 흔치는 않았다. 장래성이 인정되면 후원자도 나타나 영양보충은 물론 생활보조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과거에는 춥고 배고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란 시기가 끼니조차 변변치 않았던 50~60년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50~60년대에 활동한 복서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배 채우기도 힘든 판에 영양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어쩌다 계란이라도 하나 먹게 되는 날엔 힘이 펄펄 나는 것 같았다.

초대 세계챔피언 김기수도 바로 그런 환경에서 나서 자랐다. 함북 북청에서 태어난 그는 1·4 후퇴 때 홀어머니ㆍ 형ㆍ누나와 함께 피란길을 떠나 전남 여수에 정착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향살이가 평탄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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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뱃사람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했다. 길거리에서 구두닦이도 했고 엿판을 메고 엿장수도 했다.”

성북동 판잣집에서 어렵게 살던 시절. 아침 밥상에 아내가 어렵게 마련한 달걀이 올랐다. 아이들이 달걀이 먹고 싶다며 울었다. 김기수는 차마 목구멍을 넘지 않으려는 그 달걀을 삼키며 속으로 울었다. “아버지가 이 달걀을 먹고 힘을 내야 너희도 살 수 있다”며.

김기수의 뒤를 이어 세계챔피언이 된 복서들도 예외는 아니다. 가난한 농촌을 뛰쳐나와 무작정 상경했거나(유제두), 찌든 가난이 지겨워 가출했지만(김성준)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춥고 배고픈 생활이었다.

유제두는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당장 먹고 자는 게 급했다.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김기수 선배처럼 꼭 세계챔피언이 되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을 나온 김성준은 소매치기가 되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었고, 곧 소매치기 두목에게 알려져 ‘검은 손’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역시 틈틈이 복싱체육관을 찾아 주먹을 갈고 닦았다. 세계챔피언이 되어 방어전을 치르는 경기장에 ‘하얀 손 김성준’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장면을 40대 이상은 다 기억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을 세계챔피언이 되게 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살고자 하는 집념과 끈기였다.

63년 밴텀급 신인왕은 임인택이었다. 괴력의 파이팅에 혀를 내두른 기자들이 그 왕성한 힘의 비결을 묻자 그는 서슴없이 “자장면”이라고 대답했다. 과연 자장면만으로 스태미나를 길렀을까. 그 힘을 뒷받침해준 것은 자장면 한그릇에도 고마워 해야했던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투쟁 본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세계챔피언이 되려는 꿈….

한국은 지금까지 총 29명(IBF까지 포함하면 43명)의 복싱 세계챔피언을 배출했다.

어느새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다. 영양 과다복용으로 인한 갖가지 성인병이 청소년의 건강에도 적신호를 보내고 있는 지금, 달걀 하나 깨 먹고 “너 오늘 죽었다”고 기염을 토하던 시절, 자장면으로 스태미나를 키웠던 그 시절의 ‘헝그리 정신’이 아쉬운 때다.

한보영 (한국권투위원회 부회장)

15평 연립 전세 사는 유일한 세계 챔피언

▶ 2004년 4월 WBC 페더급 왕좌에 오른 지인진.

국내 유일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지인진(32). 세계권투평의회(WBC) 페더급에서 2차 방어까지 성공, 국제무대에서도 실력파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15평짜리 연립주택에서 전세로 산다. 1991년 프로복싱에 입문한 뒤 지금까지 그가 받은 대전료 총액은 1억5000만원 정도. 1년에 1000만원 정도 번 셈이다. 가장 많이 받은 게 5500만원이다. 대전료보다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세계챔피언이 이럴진대 B급 선수들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4라운드 경기 대전료가 40만원, 그러나 절반은 매니저 겸 트레이너의 몫이고, 20만원 중 절반 정도는 현금이 아닌 경기장 입장권 등 물품으로 받는 경우도 많다. 실제 받는 돈은 10만원 내외인 셈이다. 그나마 경기가 자주라도 있으면 좋다. 전직 프로복서 이태경씨는 “1년에 세 경기를 뛰면 상당히 행복한 경우”라고 말했다.
복싱은 아직도 배고픈 종목이다. 그러나 60년대와는 개념이 다르다. 요즘은 복싱이 좋아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가 고파서 복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싱을 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다.
지인진은 오전 6시에 일어나 하루 여섯 시간씩 로드워크와 계단 뛰기, 줄넘기, 미트 치기 등을 한다.

“옛날 배고픈 시대의 선배들만큼 피나는 훈련을 한다. 하지만 선배들보다 대전료가 적다”고 말했다. “복서들에겐 80년대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그때는 야구·축구보다 인기가 좋아 복싱을 하게 된 건데, 다시 태어나면 복싱을 안 할 것 같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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