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후진타오 '오른팔' 링지화 실각시킨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지난 6월 하순 중국의 인터넷에 이런 글귀가 돌아다녔다. “정책에 문제가 생겼으니 방침이 어찌 좋으랴. 계획 완성이 어려우니 노선이 걱정이로다. 사람들을 불안케하누나. ” (政策出了問題 方針可好 計劃難以完成 路線甚憂 令人不安) 뭘 얘기하는지 알쏭달쏭하지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보통명사들을 고유명사로 해석하면 의문이 금세 풀린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형제들(4남1녀)의 실명, 즉 링지화(令計劃)를 비롯, 정처(政策), 팡쩐(方針), 완청(完成), 루센(路線)을 나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마지막 구절은 “링(令)씨 가문이 불안에 떠는구나”란 뜻이 된다.

누군가가 이 글귀를 지어 인터넷에 띄운 건 반부패 드라이브의 최선봉인 공산당 중앙기율위가 산시(山西)성 정협부주석 링정처를 입건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2월 22일 링씨 집안의 불안은 현실이 됐다. 가문의 영광이자 든든한 보루이던 링지화 통일전선공작부장이 서슬퍼런 기율위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저우융캉(周永康) 전 상무위원에 이은 다음 사냥감이 될 것이란 예상(중앙선데이 12월7일자 3면) 그대로였다. 그는 저우와 마찬가지로 조만간 당적박탈과 사법처리의 수순을 밟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링씨 가문의 추락은 교통사고에서 비롯됐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고로 회자 중인 이 사건은 후진타오 전 주석의 임기 말년인 2012년 3월 18일 새벽4시쯤 일어났다. 베이징의 순환도로인 북사환(北四環)도로를 달리던 페라리 승용차가 갑자기 고가도로 교각을 들이받고 전파됐다. 음주 운전이 아니었다면 일어나기 힘든 사고였다. 즉사한 운전자 링구(令谷)는 링지화의 외동아들이었다. 동승자 2명은 모두 여대생으로 한 명은 치료 중 숨졌다. 20대 청년에 불과한 권력자의 아들이 시가 10억원대의 페라리를 몰다 사고를 냈다는 소식은 동승한 여대생들이 나체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소문까지 보태져 인터넷에서 삽시간에 퍼졌다. 그와 함께 링지화의 형제 자매들이 그의 권력을 뒤에 업고 부정 축재를 했다거나 부인 구리핑(谷麗萍)이 남편의 후광으로 공익기금의 부이사장을 지내면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긁어모았다는 사실이 퍼져나갔다. 링이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반부패 사정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던 이유다.

링지화의 출세가도는 이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해 11월로 예정된 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25명(상무위원7명)으로 구성되는 정치국원으로의 발탁이 확정적이라던 시중의 예상은 없던 일이 됐다. 그는 사고 6개월만에 공산당 중앙판공청주임에서 통일전선부장으로 옮기는 사실상의 좌천인사를 당했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공산당 총서기를 겸직하는 국가주석에게 올라가는 모든 서류와 보고서를 미리 챙기고 면담 일정을 최종적으로 조정하는 자리다. 우리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양상쿤(楊尙昆)·차오스(喬石)·원자바오(溫家寶)·쩡찡홍(曾慶紅) 등 쟁쟁한 역대 권력자들이 이 자리를 거쳤다. 시진핑 주석은 그의 핵심측근인 리짠슈(栗戰書)를 이 자리에 앉혔다.
링은 철저히 후진타오의 사람이었다. 후진타오는 인쇄공장 직공 출신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그는 후의 10년 집권기간(2002~2012년)을 꼬박 부주임과 주임으로 재직하며 ‘분신’역할에 충실했다. 후와 링을 잇는 정치적 고리는 공산주의청년단이다. 후는 공청단 제1서기를 지냈고, 링은 공청단 지방 조직에서부터 시작해 중앙 선전부장을 지내며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링지화의 몰락이 막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이다. 공청단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上海)방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최대 계보다. 따라서 시진핑 주석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혀 가는 과정에서 공청단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산이다.

사실 시진핑 주석은 취임 초기만 해도 당내 기반이 약한 편이었다. 7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왕치산(王岐山) 기율위 서기 이외엔 그의 정치적 맹우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공청단 출신이고 나머지 상무위원들은 대체로 장쩌민 전 주석의 추천이나 영향력으로 발탁된 경우였다.

시 주석은 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직후인 2003년 1월 중앙기율위 회의를 주재하며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년 동안 고위 간부 60여 명이 줄줄이 걸려들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호랑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당적박탈 처분을 당한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과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군부 2인자)이다. 두 사람 모두 범 장쩌민 계열의 인맥으로 분류된다. 상하이 총서기를 지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당의 대권을 잡은 장은 쩡칭홍과 황쥐(黃菊) 등 상하이 시절의 부하들을 중앙 정계로 끌어올려 파벌을 형성했다. 반드시 지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그의 집권기간동안 함께 일했거나 발탁된 간부들은 장쩌민을 중심으로 인맥을 이뤘다. 장은 이를 통해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태상황’으로 불려왔다. 시진핑 주석이 대권을 쥐게 되는 과정에서도 실은 장쩌민 인맥인 쩡찡홍 전 부주석이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저우융캉 조사설이 나돌때만 해도 ‘설마 잡아들이기야 하랴”는 반신반의하는 기류가 강했다. 이를 뒤집고 저우를 제물로 삼음으로써 시 주석은 장쩌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세력은 공청단이다. 후진타오 집권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공청단은 시진핑 체제들어 다소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당내에 무시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3년 뒤인 2017년 19차 당대회에선 상무위원 7명 가운데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를 제외한 다섯명은 물러나야 한다. 이른바 ‘육상칠하’, 즉 68세를 상무위원의 정년으로 삼는 공산당의 내부 규칙 때문이다. 이 다섯 자리를 놓고 경합 중인 유력 인물 가운데 공청단 출신으론 리위안차오(李源潮 ) 부주석과 왕양(汪洋) 부총리,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가 있다. 모두 바로 아래 단계인 정치국원이다.특히 후춘화는 쑨정차이(孫政才) 충칭시 서기와 함께 2022년 20차 당대회에서 포스트 시진핑을 넘보는 주자다. 만약 이 세 사람이 모두 정치국원 진입에 성공한다면 리커창 총리와 함께 상무위원 7석 중 4석을 공청단이 차지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상황은 시진핑 주석으로선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 주석은 그 전에 권력을 자신에 집중시키고 정치적 카리스마를 한층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굳이 공청단 출신을 배척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안거나 정치 파벌로서의 응집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성역없는 반부패 전쟁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역사학자이자 정치분석가인 장리판(章立凡)은 “편하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반푸패는 본질적으로 권력투쟁”이라고 말했다. 공청단 출신의 현직 간부 링지화를 실각시킨 것은 3년 후의 집권 2기를 내다본 포석이란 분석이 나오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