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씨의 시 『천노 일어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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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달의 시 중에는 김종해씨『천노,일어서다』(시집), 오세영씨의『사랑한다고 말할때』(시집「가장 어두운 날 저넉에」중), 곽재구씨의『대인동부루스』(오월시), 김준태씨의『새』(문예중앙·겨울호)등이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김종해씨의「천노.일어서다』는 고여 최충헌의 무단정치때 일어난 노비들의 반란인 「만적의 난」을 소재로 쓴 2천행의 장편서사시. 이 시의 중심 줄기는 휴머니즘이며 그 근본적인 명제는 자유와 평등이다. 김씨는 이 영원한 주제를 시적으로 소화했다.
만적과 그 동지들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저항이 불멸의 것이며 인간의 탐욕이 빚은 불의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노래했다.
평론가들은 이 장편서사시중 만적과 그 동지들이 감옥속에서 부르는 영가를 이 작품의 두드러진 부분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려의 귀족과 양민과 천노의 삶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여 체험적 감동을 자아내게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만적과 그 동지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제시한다.
오세영씨의『사랑한다고 말할때』는 평이하면서도 한 시대의 어두움·그리움·사랑의 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
허무를 이야기하면서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식이 담겨 있다.
곽재구씨의『대인동·부루스』는 명절에 쓸쓸한 창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늘진 곳에서 괴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곽씨의 관심은 『조경님』등의 작품에서 드러나 왔지만 이같은 시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 시인의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김준태씨의 『새』는 새와 인간의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의 대치를 보여주면서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꿈이나 희망·갈망·아픔과 한 때문에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이지만 바로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노래한 작품이다.

<도움말 주신분="최동호·윤재걸">

<작가와의 대화|「만적」의 참 인간상 그리려 힘써>
「한햇동안의 자료수집과 또 한햇동안의 집필로「천노, 일어서다」를 완성했습니다. 우리역사에서 어떤 성웅이나 호걸·문사들 보다도 더 절실한 삶을 살았던, 짓눌리면서도 구속된상황에서 뻗어나려는 자기구원을 위한 노력을 했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서사시를 쓰고 싶었고 이번 작품은 그 첫 번째 것으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만적의 난」을 우리역사상의 최초의 민권싸움으로 본다는 김씨는 만적을 그리면서 그를 우상화하지 않고 자기 삶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참 인간의 모습으로 부각시키려 애썼다.
최근들어 김씨의 시는 현실감각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는 문예지에 발표한 시론에서우리시를 ①설탕물시 ②소금물시 ③맹물시 ④알콜시라고 다소 우스꽝스럽게 분류한 적이 있다. 설탕물시는 서정시·연시를, 소금물 시는 현실비판의 풍자시·의식이 있는 시를, 맹물시는 인간의 삶·존재에 있어서의 영원추구에의 탐구를 하는 시로 각각 설명했다. 알콜시는 현학추구의 난해시로 가짜시로 보았다. 그러면서 김씨는 자신의 시가 시대의 상황이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소금물시로 가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의『항해일지』는 이같은 시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 것이다. 도시를 바다에 비유하고 그속에 바다의 불법자·반도덕자인 상어와 같이 불법·반도덕을 자행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정작 나는 갑판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하였다.』(항해일지④)
김씨는 시인의 연약한 언어로는 직접 싸울수 없지만 언어가 제시하는 힘, 환기하는 힘으로 이들 불의와 싸우려한다.

<임재걸기자>
『천노, 일어서다』
깊은 어둠속에서 빛을 내는 것은 창검과 짓눌린자들의 원한 뿐이다. / 살의를 품고 번쩍이는 창검은 불빛을 받아야 그 빛이 번쩍이지만 / 묶이고 짓눌린자들의 원혼에서 타오르는빛은 스스로 번쩍인다. / 어둠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권세가의 웃음소리와 탐욕이 커지면 커질수록 / 짓밟혀 핍박받는 그 빛들은 숨어서 모여 한줄기 섬광을 이룬다. / 고려의 가혹한 어둠속에서 / 깊이 감추어진 그 섬광을 모아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서는 자, 일찍이 베들레헴에서 빛난 별들보다도 더 크고 강렬한 섬광, 신의 계시를 받지도 않고 스스로의 생명의 요구에 의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의 죽어가는 힘으로써 스스로 차오른 개경의 섬광 / 채찍을 받아서 가죽이 터지고 / 오라에 묶여서 피에 젖어서도 / 개경의 그 섬광은 먼 뒷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 점지받은 이땅의 하늘 위를 영원히 떠올라 / 짓밟히고 짓눌린 사람들의 용기와 힘이 되었다.(하략)(천노,일어서다』의 서시 첫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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