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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가 젊음을 떠나보내는 순간

중앙일보

입력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원제 Clouds of Sils Maria, 12월 18일 개봉,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는 20년 전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연극에 다시 출연하게 된 중년 여배우 마리아의 이야기다. 탐나는 역할을 어린 여배우에게 빼앗기고, 더 이상 젊지 않은 육체와 정신에 괴로워하는 마리아. 이를 연기한 배우는 마리아처럼 어느덧 50대가 된 줄리엣 비노슈.

올리비에 아사야스(59) 감독은 서면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줄리엣 비노슈와의 특별한 인연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줄리엣 비노슈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를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제안이었나.
“설명하자면 매우 길다. 줄리엣 비노슈와 처음 만난 건 내가 각본을 쓰고, 그가 주연을 맡은 ‘랑데부’(1985, 앙드레 테시네 감독)란 작품에서다. 이후 비노슈는 내게 친구이면서도 여전히 신비스런 매력을 풍기는 여배우였다. 20여 년이 흘러 내가 연출을 맡은 ‘여름의 조각들’(2008)에 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면서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 비노슈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자고. 구체적인 내용이 즉각 떠오르진 않았지만 좋은 영화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비노슈와 나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인생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구상했다.”

-주인공 마리아는 20년 전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에서 중년 여성인 직장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몰고 가는 젊은 인턴 사원 시그리드 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이제 중년이 된 마리아가 같은 연극에서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 역을 맡으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는 비노슈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만든 설정인가.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마리아는 젊고 아름답고 당당한 시그리드 역에 사로잡혀 산다. 그래서 헬레나 역을 맡고서도 그 역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젊음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비노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감정은 누구라도 겪어봤을 것이다. 시시각각 세간의 평가에 시달리는 여배우라면 그런 감정에 더욱 익숙할 것이고.”

-젊은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마리아가 함께 대사를 연습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연극은 실제 삶을 반영할 뿐 아니라 어떤 순간의 베일을 벗겨서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끌어내는 힘이 있다. 발렌틴은 시그리드의 대사를, 마리아는 중년 상사 헬레나의 대사를 읽는데 그 모습이 꼭 마리아가 공연할 연극과 같다. 대본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둘에 대한 진실이 드러난다. 발렌틴과 마리아가 각각 시그리드와 헬레나의 모습을 닮았다는 점, 두 사람이 연극의 두 주인공처럼 친구 이상의 관계라는 점이다.”

-마리아가 대사를 연습하는 곳이 깊은 산속 외딴 집이다. 고립된 공간으로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마리아는 헬레나의 대사를 연습하면서 젊음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게 된다. 도심에서 지냈다면, 온전히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도심에선 여배우들이 온갖 미디어와 사람들에 둘러싸여 실시간으로 찬사나 혹평에 시달리지 않나.”

-제목에 나오는 ‘실스 마리아’는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이자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다. 이곳의 어떤 점에 끌렸나.
“실스 마리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말로야 스네이크’를 봤다. 실스 마리아의 말로야 고개에 구름이 뱀처럼 나타나는 현상 말이다. 구름이 산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움직이는 장면이 매우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빛·공기·안개 그리고 가파른 산자락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 보였다. 철학자 니체는 영원 회귀 사상을 다룬 글에서 이 곳을 ‘세상의 어떤 곳보다 높은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말로야 스네이크의 구름과 실스 마리아의 고요한 분위기가 영화 속 분위기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할리우드 스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마리아의 매니저 발렌틴 역으로 캐스팅한 점이 흥미롭다.
“언뜻 보면 극 중 할리우드 스타로 나오는 조앤(클로이 모레츠) 역이 크리스틴 스튜어트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기 생각을 거침 없이 주장하면서도 속 깊은 발렌틴 역에 그가 제격이라고 봤다. 사실 캐스팅이 성사된 건 그의 도전 정신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스튜어트는 블록버스터 영화만 아니라, 유럽 감독의 작품에 출연해 현실 세계와 밀착한 인물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또 이번 영화에서는 선배 배우 비노슈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영화를 1막과 2막 그리고 에필로그 등 세 부분으로 나눠 구성했다. 연극의 형식을 빌린 것인가.
“이 영화의 각본을 쓸 때부터 참고한 연극이 있다. 감독이자 각본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1970년대에 쓴 희곡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이다. 유명 여성 디자이너와 비서의 특별한 관계가 이 연극의 주요 설정이다. 이를 극 중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에 빌려왔고, 젊음과 나이 듦을 대조한 부분도 연극에서 참고했다. 결국 1막과 2막으로 나누는 구성도 연극의 요소를 그대로 살린 것이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를 유독 많이 연출했다. 여배우를 다룬 이번 영화도 여성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 영화에는 항상 강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스릴러영화 ‘카를로스’(2010)와 68혁명 이후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를 다룬 ‘5월 이후’(2012)를 제외하곤 말이다. 어떤 점에선 남성보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게 더 익숙하다. 하지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여성에 대한 영화라고 한정 짓긴 어려울 것 같다. 배우 줄리엣 비노슈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영화를 구상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누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젊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은 소중히 간직해야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현재에 충실한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인생의 긴 여정에서 지금 자신이 어느 시점에 있는지, 또 그 시간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질문한다면 좋겠다.”

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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