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해마다 수도를 옮깁시다, 문화 수도를 …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김 원
건축가
코리아문화수도 선정위원

“그럽시다. 저도 돕겠습니다. 취지를 듣고 보니 대단히 좋은 발상입니다. 이런 의미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앞장서겠습니다.”

 코리아문화수도조직위원회를 통해 “해마다 서울을 옮기자”는 ‘문화수도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자리에서 내가 처음 한 말이다. 해마다 문화수도를 선정해 그 지역에 전국의 문화예술 자원들을 불러들여 1년 내내 알차고 풍성한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한다니, 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참신한 발상인가.

 제주시에서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이 열리고, 서귀포시에서 ‘진짜 사나이’들이 참가하는 지상군 퍼레이드가 펼쳐진다고 상상해보라. 제주만의 문화 인프라에 전국적인 문화 콘텐트들이 더해진다면 제주는 1년 내내 매력이 넘치는 문화 거점으로 부상할 것이다. 그것이 경기도 수원이 될 수도 있고, 전남 진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가 같고 문화적 기반이 다르지 않은데, 평양이나 개성에선들 못할까.

 사실 우리나라는 지역마다 굉장히 특색이 강하고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건축과 도시계획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별로 각기 다른 생태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곳곳마다 삶이 다르고 문화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모든 게 한 군데, 즉 중앙으로 집중돼 왔다. 또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 결과 서울로 대변되는 수도권에 모든 게 쏠렸다. 이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소외나 대립 등 부작용들도 나타났던 게 사실이다. 참 우스운 일이다. 말로는 문화의 다양성이니, 창조적 융합이니, 특색 있는 문화생태계 조성이니 떠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정치·경제·교육·문화의 모든 인프라를 서울이 독점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다양성과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성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

 “뜻도 좋지만 때도 좋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이 강토를 덮고 있는 우울의 그림자에서 온 국민이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이 시대 전 지구에 깔린 불안의 그늘을 걷어낼 양광이 이 땅에서부터 빛나야 합니다.”

 1976년 고 한창기 선생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며 “문화는 꽃이 아니라 뿌리이고, 정치나 경제는 그 열매”라고 말한 바 있다. 문화의 근원적 힘을 강조한 말이다. 한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근원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뿌리가 굳건하면 정치·경제·교육·복지 등 모든 게 정상화될 것이다. 지역 갈등이니 소외 같은 문제도 저절로 풀려 국민적으로 큰 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85년 시작된 ‘유럽문화수도’가 그것을 입증했다. 유럽 대통합을 기치로 시작된 유럽의 문화수도 프로젝트는 해당 도시민들의 전폭적인 참여와 이웃 도시들과의 교류, 그리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으로 전 유럽의 관심 속에 이어져 오고 있다.

 2008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된 영국 리버풀의 경우 연간 15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 중 공연 관람객이 98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구 44만 명에 불과한 리버풀은 문화수도 행사를 통해 쇠락한 공업도시라는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개선시켰다. 현재 리버풀은 비틀스의 고향으로 수많은 문화유산과 스토리를 보유한 문화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그 결과 약 8억 파운드(약 1조3660억원)에 달하는 경제적 효과까지 더해지며 문화수도 사업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코리아문화수도’ 프로젝트다. 유럽이나 아랍, 중남미 등의 대륙별 문화수도 선정과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한 나라 안에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문화수도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되면 그 파장은 더욱 즉효적이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미칠 것이다. 문화수도에는 오감을 충족시키는 콘텐트들이 모이고, 문화나 예술은 물론 건축과 과학기술 등 모든 문화 장르가 망라돼 도시 재생에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

 문화수도의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은 상태다. 그동안 서울시나 수원시 등에 사업설명회를 개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5년 1월 초에는 제주도에서 사업설명회를 개최하고 2월 말엔 2016년, 2017년, 2018년 문화수도를 발표할 예정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문화수도에 대한 지자체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으며, 이미 수많은 문화예술인이 문화수도 취지에 공감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고 한창기 선생은 “정치나 경제가 문화를 살찌우는 일이 있기는 하되, 그것은 큰 연장으로 만든 작은 연장이 도리어 큰 연장을 고치는 데 쓰임과 비슷하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는 코리아문화수도라는 ‘큰 프로젝트’를 위해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자체, 문화예술계 종사자 등 ‘작은 연장’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 그리고 참여가 절실한 때다.

김원 건축가 코리아문화수도 선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