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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대한민국의 대세는 '버티는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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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식
강인식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요즘은 모든 게 ‘미생’으로 보인다. 엄청난 이야기로 발전했지만 ‘땅콩 회항’의 조연들은 월급쟁이인 우리와 닮은 데가 많다.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의 말단인 최 경위와 한 경위도 그렇고. 2014년을 돌아보면 문화·예술도 사건·사고도, 그리고 워킹맘 아내와 나의 삶도 하나의 단어로 정리된다. 버텨내기.

 이 같은 통찰은 독자 윤경선(36·경기도 용인)씨가 전해준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올해의 테마는 단연 ‘버티는 삶’이며, 이는 ‘웰빙’ ‘힐링’에 이은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했다. JTBC 썰전·마녀사냥의 허지웅이 쓴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읽고 감정이입을 하고, 드라마 ‘미생’을 보며 “이건 나와 남편의 이야기”라며 수없이 가슴이 짠했다고 한다. 때마침 아내는 내 책상 위에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1·2권을 살포시 놓고 정독을 종용하고 있었다.

 무엇이 요즘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을까. 그 출발은 ‘보잘것없는 나의 근본’이다. 허지웅은 ‘버티는 삶’을 얘기하기 위해 ‘모욕당한 엄마’에 대한 기억을 길게 언급한다. “우리는 대개 별거 아닌 존재”라는 점도 강조하면서. 드라마 ‘미생’은 1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쓰러져 꿈을 포기한’ 주인공의 상황을 짚고 넘어간다. 『하이힐…』의 펀드매니저이자 워킹맘 케이트는 가정 불화 속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보잘것없는 나는 맨주먹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좋은 성과를 위해 때론 비굴했고, 그래서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배경’이었던 부모의 희생을 하나씩 천천히 발견해왔다. 나는 어느새 내 아이의 ‘보잘것없는 배경’이 됐고, 과거에 나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군에서 유격훈련 세게 하고 ‘어머니 은혜’를 부르며 엉엉 울었던 건 나를 위한 ‘힐링’이지 철이 든 건 아니었다. ‘미생’의 오상식이 사표를 쓰며 아내에게 미안해하는 것, 자기는 그만두면서도 장그래에게 “버텨라. 이겨내라”고 말하는 것, 내 인생 곳곳에 숨어 있던 희생을 발견하는 것, 이런 것들이 모여 내가 되는 것이다.

 『하이힐…』에서 케이트의 친구는 만약을 대비해 유언을 작성하며 ‘아빠는 아이의 손톱을 깎아준다’는 문장을 넣는다. 아! 이건 완전 내 얘기잖아. 최근 일이다. 야근하고 들어갔더니 불 꺼진 방에 아내가 아기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왜 안 자고?” “손톱 깎으려면 애가 더 깊이 잠들어야 해.” 나는 ‘그럼 야근하고 들어와서 깎으라고 하지’라는 말을 하려다 집어넣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기용 가위로 손톱을 자른 적이 없었다. 우리 부부의 바깥일은 같았으나 집안일은 그렇지 않았다.

 올 한 해 사람들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미생인 우리에게도 판타지는 남아 있다. 오성식과 장그래는 창업을 했고, 케이트는 과감히 직장을 그만뒀으며, 허지웅은 스타가 됐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 행복을 얻게 될 거라는 판타지마저 버릴 순 없다. 2015년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