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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의 몸은 역사보다 정직하다

중앙일보

입력

태조에서 26대 고종까지….

 조선의 왕들은 대체로 건강하지 못했다. 백성들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평균 수명이 47세에 불과했다. 60세 환갑잔치를 치른 왕은 태조(74세)·정종(63세)·광해군(67세)·숙종(60세)·영조(83세)·고종(68세) 등 6인뿐이다. 지금 같으면 항생제 등으로 치료 가능한 종기 때문에 숨진 왕도 있다. 문종·정조·순조다. 사인(死因)이 노환인 왕은 정종·광해군·영조 정도다.

 세종은 소갈병(당뇨병)·임질·안질·강직성 척추염·중풍을 앓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그는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라고 탄식했다. 선조는 “왕 노릇 하다가 미칠 것 같다”고 비명을 질렀다. 소화불량과 설사에 시달린 현종은 “오장(五臟)이 불에 타는 듯해 죽고 싶다”라고 고통을 토로했다.

 한의학 박사(전 대구한의대 교수)인 서울 갑산한의원 이상곤(49) 원장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약방일기』 등에 기술된 의료 기록을 토대로 조선 왕의 건강과 질병을 파헤쳤다. 그는 지난 5년간 조선 왕들과 ‘내밀한 대화’를 나눈 뒤 최근 『왕의 한의학』사이언스북스)이란 책을 펴냈다.

◆영조=이 원장은 조선의 왕들 가운데 건강과 관련해선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 영조를 꼽았다. 전체 왕들의 평균 수명보다 두 배 가까이 장수해서다.

 “영조는 건강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평생 한약을 달고 산 약골이었다. 특히 소화력이 약해 찬 곳에 앉으면 바로 설사를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질병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스스로 건강을 지켰다. 체질적으로 냉(冷)한 몸을 보완하기 위해 전복·새끼 꿩·사슴 꼬리·송이버섯 등을 찾아 먹었다. 따뜻하고 매운 성질을 가진 음식과 약차와 이중탕을 평생 복용했다. 영조는 자신의 배 속 냉기를 멈추게 한 이 처방을 ‘나라를 세운 공로가 있는 약’이라 해 건공탕(建功湯)이라 이름 붙였다.”

 영조는 과식과 고기를 피하고 반찬 수를 줄이며 소박하게 먹었지만 세 끼 수라상은 아무리 바빠도 챙겼다. 심지어 아들인 사도세자가 숨진 날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영조의 콤플렉스와 아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해 ‘임오화변(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이 원장의 진단이다. 이 원장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 영조의 건강 관리법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조=이 원장에게 선조는 ‘안쓰럽고 슬픈 왕’이다. 전화(戰禍)와 이념의 질곡 속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는 이유에서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평생 소화불량·편두통·이명에 시달렸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기대승 등 자신을 가르치려는 신하에게 받은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임금은 정치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인데 당시 성리학의 3대 대가들은 선조에게 고요하면서도 욕심이 없는 성인 같은 삶을 요구했다. 자신이 학자들에게 배운 것과 실제 현실의 괴리가 왕을 주눅 들게 했다. 미주신경 과(過)긴장증으로 음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일도 겪었다. 율곡은 여색(女色)을 삼가지 않아 목소리가 변한 것이라고 왕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명의 허준이 주치의였지만 병을 달고 살았던 그는 57세 나이에 급체와 중풍으로 세상을 떠난다.

 “선조 당시 조선에서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선조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착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몸이 살살 녹는다. 스트레스로 선조는 평생 밥을 제대로 못 먹고 무를 안 먹으면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아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신하들은 선조가 한약인 숙지황을 복용할 때 무를 못 먹게 했다. 숙지황은 혈액을 만드는 약인데 무처럼 흰색 식품은 기(氣)를 깨버리는, 파기(破氣)음식이란 이유에서다. 대신 붉은색 기운이 도는 강화산(産) 순무를 권했다. 붉은색은 혈액과 관계가 있고 순무에 혈액을 돕는 성분이 있다고 봐서다.”

◆세종=이 원장에겐 세종도 ‘슬픈 왕’으로 비춰졌다.

 “세종이 건강하지 못했던 것은 조선 개국 정치사의 산물이다.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의 갈등, 큰아버지 정종·원경왕후·태종의 국상을 잇따라 치르면서 재위 초기부터 심신이 약해진 상태였다. 국상이 8∼9년이나 이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원경왕후가 학질에 걸리자 효성 지극한 아들 세종은 어머니를 자신의 등에 업은 채 몰래 궁궐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래야 학을 뗄 수 있다고 여겨서다. 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고 복숭아 가지를 들고 주문을 외우게 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장영실을 중용한 과학적인 왕이지만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스님·무당에게 의존한 인간적인 왕이었다. 즉위하자마자 온기가 있는 감옥, 즉 온옥(溫獄)을 설치하라고 지시한 것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게 한다.”

 두 형을 제치고 왕이 된 세종은 미안한 마음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중국의 의원 하양은 세종을 진맥한 뒤 속에 화(火)가 많다고 진단했다. 실록에 따르면 재위 13년에 경복궁 2층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그 후론 허리를 거의 구부리지 못하고 다리도 절룩거렸다. 지금으로 치면 강직성 척추염으로 의심된다. 소갈(당뇨병)이 심하고 허리를 굽히지 못해 중국에서 사신이 와도 전별 잔치를 열지 못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중풍이었다.

◆광해군과 인조=광해군과 인조는 무당에게 치료받기를 좋아했다.

 저주병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공통점이다. 사람의 얼굴을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거소 주변에 사람 뼈·고양이 등을 묻어 그 사람이 죽기를 기원하는 것이 저주병이다. 이는 광해군과 인목대비가 싸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광해군은 누군가가 자신을 저주할 것이라 생각해 무당을 늘 데리고 다니면서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선 “죽어서 무당 되면 밥(굿판 음식) 하나는 실컷 먹겠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언제 왕좌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다.

◆문종=세종의 아들이자 ‘비운의 왕’ 단종의 아버지였던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종기(등창)로 숨진다. 등창은 등에 생긴 종기로, 오래 누워서 지내는 환자에게 생기는 욕창과는 다른 병이다.

 “문종의 등창 원인으론 독한 술, 기름진 음식, 지나친 성생활이 꼽힌다(동의보감). 하지만 문종의 실제 식습관·생활습관은 이와 달랐다. ‘바른생활 남’이었고 대체로 건강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면 문종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 문종은 3년상을 치렀다. 아내와 두 번의 생이별, 한 번의 사별을 한 불행한 가정사도 병의 원인이 됐다. 첫 번째 부인은 문종의 사랑을 얻겠다고 궁중에서는 금지된 주술 행위를 하다가 쫓겨났다. 두 번째 부인 봉빈은 동성애를 벌이다 발각됐다. 세 번째 부인은 아들을 낳고 다음 날 죽었다. 이로 인한 마음의 화가 종기로 분출됐다고 여겨진다. 과거엔 종기도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중한 병이었다. 종기로 인한 사망이 크게 감소한 것은 수돗물이 널리 보급돼 물의 위생 상태가 개선된 것과 관련이 크다.”

 결국 종기 하나가 조선의 역사를 바꿨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 당대의 권신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계유정난’으로 이어졌다.
 
◆정조=조선의 ‘계몽 군주’ 정조도 문종처럼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 사인은 종기지만 종기가 돋은 지 불과 14일 만에 숨져 독살설이 퍼졌다. 하지만 이 원장은 “정조는 독살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정조 독살설’의 근거가 된 ‘연훈방’이 유해 중금속인 수은을 태워 그 연기를 환부에 쏘이는 처방인 것은 맞지만 사흘간의 치료론 치명적인 수은중독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정조의 등에 난 종기와 인삼 약재 처방이 부른 약화(藥禍)라고 규정했다. 인삼은 정조의 체질과 극단적으로 맞지 않는데 인삼이 들어간 경옥고를 복용한 것이 혼수상태에 빠진 원인으로 꼽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정조는 평생 그 트라우마로 인한 화증(火症)에 시달렸다. 평생 인삼을 입에 달고 살았던 할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평소 인삼을 멀리 했다. 종기가 생기자 의관과 대신들은 “종기를 없애려면 열을 밀어내야 한다”며 인삼이 든 경옥고를 권했다.
 
 그렇다면 산해진미와 12첩 수라상을 받은 왕들이 왜 평생 병을 달고 살았을까?

 “대장금이 만든 진수성찬을 제대로 먹은 왕은 드물었다. 많은 왕이 집권 스트레스 때문에 입맛이 떨어져 죽을 주로 먹었다. 선조는 무를 자주 먹었다. 시원해서 마음의 화가 가라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왕들에게 내성외왕(內聖外王), 즉 안으론 성인, 밖으론 왕을 주문했다. 금욕적인 식생활을 통해 수양하도록 했다. 효종이 ‘전복을 먹었다’고 했더니 송시열이 ‘음식을 찾는 것은 천한 일’이라고 핀잔했을 정도다.”

 이 원장은 왕들이 질병에 시달린 것은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건강은 자신이 지킬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정치·경제적 사건이나 시대정신의 변화는 조선 왕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책에 ‘조선 왕의 몸은 역사보다 정직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래서다. 왕의 몸은 조선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바로미터이므로 이들의 건강을 연구하면 기존 역사 연구를 보완할 수도 있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tk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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