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없는 정치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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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3년 l월×일 상오11시. 경기도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리고 있는 ××회의소 회의실.
『지금부터 민한당○○지구 지구당개편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단상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중앙당에서 내려보낸 요령에 의해 개편대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당권경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원장이 교체되는 대회도 아니어서 대회장 분위기는 차분하고 질서정연하기만 하다. 마이크를 잡고있는 사회자의 고성이 대회장 분위기와는 오히려 대조적이다.
『먼저 임시집행부 선출에 들어가겠습니다. 의견이 있으신 대의원은 거수해 주십시오] 『××면 출신 대의원 ○○○입니다. 임시의장에는 본 지구당 부위원장이신 △△△선생을 박수로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의견에 동의하시면 박수를 쳐주십시오.』『불초 소생을 임시의장에 선출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위원장 선출에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선출방법에 대해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면 출신 대의원 ×××입니다. 선출방법은 구두호천으로 하고 위원장에는 본 지역출신의원이시며 현 지구당위원장이신 ○○○의원님을 재 추대할 것을 동의합니다. 박수로 선출에 동의해 주시기바랍니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새 위원장이 선출된다. 마치 구시대 공화당의 지구당 개편대회를 방불케 한다.
과거 야당 지구당의 대의원들이 허름한 옷차림에 장·노년도 이 대부분이었던데 비하면 말끔한 넥타이 차림의 젊은 층이 많아졌고 오메가·롤렉스시계가 더러 눈에 띄는 것도 전과는 다른 현상이지만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대회장의 열기.
축사에 나선 당 간부들이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 열변을 토해도 대의원들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고 침착하기만(?)하다.
열렬한 박수도 없고 박수를 유도하는 별동 부대의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열기 없는「요식 대회」란 느낌이다.
2년만에 열리는 야당의 지구당개편대회가 이같이 조용하기만 한 것을 보고 야당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생태와 체질 면에서 많은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과거처럼 주·비주류로 나뉘어 치열한 득표 극을 벌이고 한 표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대의원을 납치하는 소동까지 벌이는 것은 물론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개편대회라는 정치행사가「정치」없이 진행되고 당원의 정치의사가 표출됨이 없이「행사」만으로 끝난다면 그 역시 바람직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지구당대의원들에게도 정치의사가 없을 수 없지 않겠는가.
더우기 밑으로부터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야당이 스스로 추구하고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가 아닐까. <고흥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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