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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선상에서 상생협약, 협업의 싹을 키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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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충영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중앙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경제학

얼마 전 한강 선착장의 크루즈선에 올랐다. 의류업계의 대기업 대표와 100여 개 협력업체 임직원들이 모여 상생협약을 체결하는 현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대기업과 협력업체 대표, 그리고 동반위가 상생협약서에 함께 서명했다. 대기업 대표는 인사말에서 “그동안 협력업체들에 소홀히 한 점이 많았으니 앞으로 정말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협력업체의 임직원들을 향해 큰절을 했다. 게다가 한 협력업체의 여성 대표에게 회사가 제작한 신발을 직접 신겨 주었다. 선상에서 협약행사를 치른 이유는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명심하자는 데 있었다. 협력업체의 대표들도 최선을 다해 좋은 부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필자는 축사에서 크루즈선상의 협약을 한국판 ‘메이플라워 콤팩트’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산 패션 의류제품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진솔한 협업으로 해외시장에서도 명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를 기원했다.

 메이플라워호의 선상협약은 1620년 영국을 출발해 신대륙으로 항해하던 이민자들이 선상에서 맺은 사회계약이었다. 신천지에서 민간자치를 수립하고 분쟁 해결의 원칙과 질서유지를 위한 기본규범을 담았다. 그리고 다수결 원리에 따라 모든 규정을 준수키로 했다. 35명의 청교도들과 66명의 비신도들은 대서양을 60여 일의 항해 끝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종교적 자유와 인간의 자유 의지가 구현되는 새로운 이상향을 향한 메이플라워호 협약정신은 그 뒤 미국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한강의 선상협약에 참여한 기업들이 만드는 의류는 한때 우리 수출의 효자 품목이었다. 지금 의류산업은 디자인·색상·기능 면에서 첨단 고급패션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2012년 의류를 포함한 섬유류의 전 세계 수출시장 규모는 710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의류만을 놓고 볼 때 수출시장 규모는 4230억 달러에 이른다. 같은 해 우리나라는 139억 달러의 섬유류를 수출해 세계시장에서 2%의 비중을 차지했다. 패션의류는 고소득 경제에서 그 수요가 늘어나는 후기산업(late industry)에 속한다. 세계적 의류업체인 스페인의 자라 본사를 3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제조·유통·연구개발 등 전 과정, 부품업체들과의 유기적 협업구조를 볼 수 있었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매장에서 특정 모델의 판매실적이 실시간으로 파악되고 있는 점이 놀라웠다. 당시 이미 빅데이터를 이용하고 고객이 선호하는 디자인으로 온라인 고객 맞춤형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패션의류도 한류처럼 세계적으로 브랜드화하고 수출을 늘릴 수 없을까. 패션의류는 수십 개의 소재와 부품을 필요로 한다. 협력업체들이 중간재를 잘 만들고 대기업은 인체공학까지 감안한 디자인과 색상 등으로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는 유연협업생산 체제를 갖춰야 세계로 뻗어갈 수 있다. 고급 염료와 기능성 원단을 공급하는 고부가가치의 연관효과 산업도 진흥시켜야 한다.

 이제 대·중소기업 간 협업문화는 우리 기업의 생존전략 차원에서도 정착돼야 한다. 지금 중국 업체들은 조선·철강·전자 등 우리의 주력업종을 추월하거나 위협하고 있다. 짝퉁 브랜드가 난무하는 중국의 수많은 의류업체와 이제 진품과 고가 패션의류로 승부하려고 한다. 중국은 2012년 전 세계 섬유류 수출시장에서 43%를 차지했다. 우리가 모든 산업의 완제품에 이어 부품과 소재 등 중간재 산업에서도 중국에 밀리면 어떻게 되는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중국 상품은 이제 더욱 쉽게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폄하지만 부동의 세계 3위 경제대국 위상을 지키고 있다. 일본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부품과 소재에서 수많은 강소기업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의 첨단부품과 소재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수출품도 일본의 초엔저에 직면해 경쟁력을 잃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심각한 협공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대기업들이 기술혁신을 위한 상생의 손길을 중소기업에 뻗치는 것이다. 대기업은 수직 협력업체뿐만 아니라 독립 중소업체들의 부품과 소재산업의 혁신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대기업에서 기술 개발에 몸을 담고 경영에 참여했던 은퇴 ‘인간자본’이 많다. 대기업은 은퇴한 인간자본을 사장할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상생 발전을 위해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면 한다. 한강 크루즈 선상의 상생협약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천돼야 한다. 새해에 이러한 협업 풍토가 우리나라 기업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해본다.

안충영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중앙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