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군밤장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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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밤을 먹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역시 추운 겨울날 따뜻한 아랫목에서 까먹는 삶은 밤이 아니면 쌀쌀한 늦가을 골목에서 구워 파는 밤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면서 까먹어야 제맛이 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인지 이곳 더운 방콕땅에서 군밤을 보기란 참 드문일이다.
물론 실롬광강이나 중국인촌에 가면 밤을 구할수는 있으나 지금 내가 말하는 밤과는 거리가 멀다.
서울거리나 내가 자라난 대구에서 거리 모퉁이 골목 어귀에서 벙거지를 눌러쓴 아저씨들이 조그마한 화덕위에 석쇠를 걸쳐놓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알밤을 구울때면 사람들은 구태여 들로 산으로 가지않고서도 『아, 가을이 깊었구나』하고 느낄수 있는 그런 군밤이 이곳엔 없다. 아니 없었다.
그런데 오늘 시내버스를 타고가다가 내가 살고있는 이 수쿰빗동네에서 처음으로 군밤장수를 본것이다. 물론 화덕도 다르고 장수도 텁수룩한 아저씨가 아니라 젊은 아가씨다. 밤을 물에 씻어서 굽는 것부터가 우리하고는 다르다. 그러나 이국에서 오랜만에 보는 군밤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나게했다.
시골의 늦가을, 서리내린 들판, 곱게 물든 단풍잎, 아람이 벌어진 밤송이, 지붕위의 붉은 고추, 파란 하늘에 시리도록 바알갛게 매달린 까치밥감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바지께서 우리남매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아버지께서는 한쪽 눈등에 조그마한 흉터가 있으시다. 어릴 때 아궁이에 알밤을 껍질채 구우시다가 얻으신 흉터란다.
밤은 껍질을 따지않고 구우면 익을 무렵 껍질 속의 공기가 팽참해 터지면서 튀어오른다는 사실을 모르시던 시절의 일이라면서 어린 우리 4남매에게 손수 밤을 구워주시고 때로는 삶은 밤을 귀찮아 하시지도 않고 껍질을 벗겨서 고루고루 나누어 주시던 자상하신 아버지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나도 어른이 되어 두아이의 어머니가 된 지금, 가끔 아이들에게 벌을 주거나 꾸중을 할때면 매사에 찬찬히 타이르시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상기하지 않을수 없다.
긴 겨울밤 들려주시던 수많은 동화들, 자라면서 좌절할 때마다 격려와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시던 아버지의 사랑, 나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끝이 없다.
지금도 보내시는 편지마다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대할 때면 나도 우리 부모님 못지 앓게 내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수 있는 엄마가 되고자 그때마다 새로이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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