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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스타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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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의 최대 소망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아르투르·루빈스타인」옹이 만년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아다지오의 마지막 소절을 들으며 숨을 거두는 것이 둘도 없는 소망이라고-.
20일 제네바 자택에서 영면한 「루빈스타인」의 연세는 95세 두 세기에 걸쳐 1백년 가까이 살았다.
우선 천수를 다한 그의 건강 비결이 있었다면 열성과 쾌활 이었던 것 같다.
『인생은 좋건 나쁘건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
그의 낙천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생활 철학이다.
그는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고 있었다. 돌부처처럼 근엄한「피카소」도 그 앞에선 자주 파안대소했다.
그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한림원 회원의 자격을 받았을 때도 만면에 홍소(홍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쯤 되면 근엄해야겠지만, 근엄한 늙은이란 얼마나 슬픈 일인가 !』 그의 말이다. 언젠가 「루빈스타인」은 농담 아닌 진담으로 『나의 관심사의 90%는 여성이었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열성의 일면이다. 평소 식도락과 여성에 대한 그의 무분별은 자주 가시 돋친 세평을 들을 정도였다.
19세기말 그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의 한 한촌. 7남매의 막내.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방직공장의 직공.
그러나 「루빈스타인」은 생후 1년 6개월에 벌써 음의 호악을 분간했다고 한다. 그의 숙모가 피아노를 치는 것밖에는 달리 인연도 없으면서 그의 피아노 수련은 3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창문도, 전기도 없는 차고에서 촛불을 켜고 매일 9시간씩 피아노를 두들겨 대는 유아시절. 12세의 소년으로 베를린에서 데뷔할 때 그는 벌써 연주가로서 절정을 맞고 있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는 손가락의 균형마저 바뀌어 다섯 손가락으로 12개의 건반을 누룰 수 있었다.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은 10개의 건반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청년 시절엔 거짓말 같은 에피소드도 있다. 그가 총애하던 여인의 애인과 결투, 죽을 고비를 넘겼다. 사춘기를 넘기며 허리띠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허리띠가 먼저 끊어져 버렸다고도 한다.
2차 대전 때 미국으로 망명, 시민권을 받았다. 세계 공연을 할 때는 연중 1백50회의 연주회를 가진 적도 있었다. 질풍과도 같은 40대 시절의 생활이었다.
그와 같은 폴란드 태생의 「쇼팽」에 대한 흠모는 그의 일생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그의 집엔 「쇼팽」의 데드 마스크, 주조 된 「쇼팽의 손」, 「쇼팽」의 자필 악보, 악기 등으로 넘쳐 있다.
백발의 노옹이 되어서 누가 그를 마에스트로(거장)라고 불렀다. 「루빈스타인」옹은 정색을 하고 그 칭호를 거절했다. 『예술에 1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1인자의 호칭이 아니라 부단한 정진뿐이라는 구도 적 자세. 역시 그는 금세기 피아노의 1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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