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코미디 된 '논술 매뉴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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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시교육청은 "대학들이 논술고사에서 영문 지문을 활용하고 있다"며 영어 원문을 제시하고 요약하라는 예문까지 실린 교사용 '논술지도 매뉴얼'을 일선 중.고교에 1400여 부 배포했다. 이날은 교육인적자원부가 논술고사에서 영어 지문을 출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논술 가이드 라인을 발표한 날이다.

같은 날 서울시교육연구원도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영어 지문에 확실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2006학년도 대학입시 수시 2학기 전형의 길잡이 Ⅰ'이란 자료집을 발간했다. 자료집에는 '계열에 관계없이 공통으로 출제되는 게 영어다. 영어 지문은 통상적으로 200~300단어 정도로 비교적 짧지만 난이도는 높다'며 '모든 대학이 이런 시험을 치르는 건 아니지만 수험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이나 학과일 경우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므로 확실히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루 뒤인 31일 교육전문 방송 EBS는 영문 지문을 다루는 인터넷 학습 커뮤니티를 1일부터 개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학습 커뮤니티의 '번역방'은 영어 명문을 한글로 옮기는 내용으로 교육부의 영문 지문 불허 방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교육부의 논술 가이드 라인이 나온 뒤였기에 EBS는 간부회의까지 열어 발표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에선 당장 없앨 수 없는 만큼 발표는 하되 내용을 심층면접 대비용으로 개편해 나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교육부와 관련 기관 간 손발이 맞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관은 "오래전부터 해 온 작업"이라며 "교육부가 미리 귀띔만 해줬어도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는데…"라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논술 가이드 라인 발표가 예정돼 있던 만큼 유관 기관들이 성급하게 자료를 낸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논술지도 매뉴얼' 작성에 참여한 한 교사는 "원고 검토를 끝낸 게 지난달 20일께"라며 "당시 교육부 내부엔 이미 영어 지문을 불허한다는 방침이 섰던 것으로 아는데 우린 전혀 몰랐다"고 전했다.

자료집을 만드느라 고생한 관계자들은 속이 상할 만도 하다. 그러나 교육부의 방침에 맞춰 입시준비를 새로 해야 하는 학생들의 고통은 더욱 클 것 같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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