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태>델터특공작전 (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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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특공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던 우리의 희망, 도저히 ALE어지지 않는· 불운의 연속, 특공대원들의 용기, 작전실패가 안겨준 충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로운 사막에서의 저 비극적인축음, 이 모든기억들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겨우 한두시간쯤 잠자리에 들고서는 일찍 일어났다. 미국국민들에게 발표할 TV연실문몰을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짤막한 발표문에서 그동안 벌어졌던 상황의 개요와 그러한 구출작전의 필요성을 설명한 다음 특공작전의 모든 책임이 전혀 나에게 있음을 감가조했다.
나는 전 세계에대해 이란의 범죄행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다른 이들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바친 용감한 미군들을 찬양했다.
나는 바로 그 날 나에게 지지를 보내준 인사들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내가 이른새벽 사건개요를 TV로 설명하고 난 뒤 맨 먼저 전화를 걸어온 이는「헨리·키신거」전 국무장관이었다.

<아직 그 날의 악몽이>
그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전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냈으며 어떻게 도와 드릴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키신저」에게 주요TV방송국과 통신사에 성명을 발표해 달라고 했다. 그는 지체않고 그렇게했 다. 이집트의 「사다트」대롱령도 우리를 돕겠다고 바로 알려왔고 일본의「오오히라」 수상과 대부분의 유럽 동맹국지도자들도 같은 자세였다.
우리는 미국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무엇 보다도 기뻤다.
나는 특공대원들(그들은「델터」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이 미국으로 귀환하는대로 바로 그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4윌27일 일요일. 나는 보도기관에 일체 알리지 않은채 특공대원들을 만나러 비행기로 워싱턴을 떠났다. 특공대원들이 소속해 있는 부대이름과 그 부대의 소재지는 비밀에 붙여져있었다.
내가 헬리곱터에서 내리자 「베크위드」대령(특공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아대학의 풋볼선수 출신인「베크위드」대령은 그야말로 강인한 불굴의 사나이였다. 그는 어렸을때 내고향 플레인즈에서 몇마일 안 떨어진곳에서 자랐으며, 그리고 국가를 위해 가장 위험한 전투에 참여해 목숨을 건 자기희생을 해왔다.
「베크위드」 대령의 턱에서 경련이 일더니 끝내 그의 두뺨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두팔을 벌렸다.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키신저, 전화로 격려>
특공대장은 『대롱령각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모든 특공대원들에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보낸다고 격려했다. 이에 특공대장은 『각하, 우리 대원들을 다시 한번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 모두가 인질들을 위해 애를 쓰고있으며 나는 그 들이 자유를 되찾을수 있도록 온갖노력을 기울이겠노 라고했다. 나의 말은 어떻게하든 인질을 구출해내고야 말겠다는 뜻에었다. 따라서 나는 필요하다면 이미 시도했던 것처럼「댈터」특공대의 힘에 의존하게 될것임을 분명히 밝혀 두었던것이다.
나는 비록 그 때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란 사람들이 또 있을지도 모를 미 특공대의 재침투를 탐지하기 위해 만반의 경계태세를 강화할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특공작전 이후 이란측은 미국인질들을 여러 장소로 분산시켜 놓아 우리는 인질들의 억류장소를 알수가 없었다.
게다가 첫 번째 특공작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구출계획을 짜내지 않고 먼저번과 같은 구출작전을 시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베크위드」는 헬리곱터가 사막에서 충돌사고를 번 직후 자신이 특공작전의 취소를 건의하는 결정을 즉시 내렸다고 말하고 그러한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특공대원들이 이란을 탈출하기 전에 왜 나머지 헬기들을 파괴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란인도 지원 자청>
이에대해「베크위드」는 이 헬리콥터에는 각종 탄약이 적재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헬리곱터가 폭파되거나 화염에 휩싸일 경우 대원들이 탑승한 C-130수송기들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답변했다.
나는 또 특공작전 과정에서 우리에게 협조했던 5명의 이란인들을 접전했다. 이들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 우리를 지원해주고 싶어했다.
그런 다음 나는 특공대원을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대원들에게 그들의 염웅적인 행동에 대해 조국이 얼마나 감사해하고 있는가를 거듭거듭 말해주었다. 그들은 진정 훌륭한 대원들이었다. 나는 나의 목숨을 이들 특공대원들의 손에 주저없이 맡길수 있을것 같았다.
5월9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순직한 특공대원 8명의 영결식이 열렸다. 나는 이에앞서 택사스주의 한 법원에 입원중인 3명의 부상자들도 방문했었다.·
나는 영결식에 참석했다. 그것은 미국 대롱령으로 내가 해야했던 많은 일들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일이었다.「로절린」과 내가 좁은 대기실로 들어서자 특공대원들의 아내, 자녀, 그리고 부모들이 그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한 젊은 부인이 다가와 두손을 벌리며 내 품안에 안겼다. 나는 그 곳에 온 모든 이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한결같이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특공대원들의 죽음은 우리들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는 그들의 용기를 영원히 기릴것이다.<다음은「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무단복사 출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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