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탁상행정에 멍든 유치원 학부모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김기환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기환
사회부문 기자

자녀의 유치원 입학을 앞둔 서울 엄마들이 뿔났다. 2015학년도 서울 지역 유치원 원아모집 추첨을 마감한 12일 이후 서울시교육청엔 “중복 지원한 원아의 입학을 취소시켜 달라”는 학부모 민원이 쏟아지고 있다. 원하는 유치원에 원서를 넣었다 떨어진 학부모 이모(34·용산구)씨는 “‘중복 지원하면 불합격시킨다’는 시교육청 말을 믿고 인기 유치원 두 곳에 원서를 넣었다가 한 곳은 취소했다”며 “주변에서 (시교육청 말을 믿지 않고) 합격한 중복 지원자 얘기가 들릴 때마다 가슴에 멍이 든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시교육청을 불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교육청은 지난달 10일 유치원 원아 모집 시 대입처럼 가·나·다군별로 한 번씩 지원하도록 하는 개선안을 발표했다. 원서 접수 나흘 전인 지난달 27일엔 지원 횟수를 3회에서 4회로 늘렸다. 하지만 중복 지원을 막는 대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원서 접수 시작 뒤에야 ‘중복 지원자는 합격을 취소한다’고 밝혀 혼란을 자초했다. 일부 중복 지원자는 원서 접수를 부랴부랴 취소했다.

 중복 지원을 가려낼 방법도 마땅치 않다. 시교육청이 15일까지 유치원에 지원자 명단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상당수는 “학부모가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강동·송파구에선 지원자 명단을 제출한 유치원이 50%가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부는 “중복 지원을 이유로 합격을 취소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시교육청 말을 따른 ‘순진한’ 학부모가 손해를 보고, 학부모들끼리 서로 감시·고발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문제는 이 같은 사태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시교육청이 군별 모집 방안을 발표한 이후에도 일부 유치원은 ‘중복 지원이 가능하다’고 홍보했다. 대기번호까지 알려주며 다른 유치원 지원을 추천한 곳도 있다. 집 근처 유치원이 특정 군에 몰려 배치되는 부작용도 나왔다. 학부모 김모(33·송파구)씨는 “정책을 발표하고 시행하려면 사전에 공지해야지 정책을 내놓고 고치며 운영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혼란 가능성은 지난 6월 외부 정책연구 보고서를 통해 제기됐지만 시교육청은 간과했다.

 이번 개선안은 유치원 입시가 과열된다는 지적에 따라 나온 선의의 정책이다. 하지만 준비가 부실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스스로도 “명백한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새해엔 ‘아마추어’ 정책을 내놓고 수습하기보다 부작용부터 충분히 검토한 뒤 신중히 추진했으면 한다. ‘순진하면 손해 본다’는 인식을 가르치는 사회, 조 교육감이 생각하는 교육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김기환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