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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이해했니? 스마트폰 퀴즈 풀어야 출석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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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 11월 26일 고려대 과학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종이 없는 대형강의 ‘E=MC²’ 수업 중 스마트기기로 퀴즈를 풀고 있다. [강정현 기자]

“테러리스트가 어느 마을에 폭탄을 설치했습니다. 당국에선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만약 테러리스트의 어린 딸을 고문해 폭탄 위치를 알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 4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특강을 했다. 강의라기보다 마치 토크쇼 같았다. 도덕적 딜레마와 관련한 질문을 던진 뒤 청중에게 마이크를 넘겨 답을 듣는 식이어서다. 줄잡아 20여 명이 꾸준히 손을 들었다. 샌델 교수는 하버드대에서도 이처럼 수업한다. 공리주의·사회계약론 등 핵심 개념을 절대 공짜로 알려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이 각자 의견을 얘기하면 이를 다시 토론에 부친다. 정의의 철학적 개념을 스스로 깨닫게 한다는 취지다.

 요즘 한국 대학가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수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독특한 강의 현장을 찾아가 봤다.

 # 국내 유일의 종이 없는 수업

 고려대 과학도서관 강당에서 진행되는 이정일 물리학과 교수의 ‘E=MC²’ 수업은 300여 명이 듣는 대형 강의다. 종이가 쓰이지 않는 국내 유일의 수업(Paperless class)이다. ‘스마트폰은 치워 주세요’라는 지시사항 대신 학생들은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로 수업 자료를 보면서 강의를 듣는다. 수업 도중 스마트 기기로 퀴즈가 전달되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 교수가 알려주는 암호를 입력한 뒤 문제를 풀어야 한다. 퀴즈는 대부분 방금까지 수업한 내용과 관련돼 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10개 퀴즈 중 8개 이상을 맞힌 학생에게만 출석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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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C²’ 수업은 5년 전 개설됐다. 이런 독특한 수업 방식은 올해부터 시행 중이다. 학생들과 소통이 없었다는 반성에서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강의가 어렵다고 해 과연 얼마나 내 강의를 이해하는지 신속하게 알려고 방식을 바꿔 봤다”고 말했다.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피드백을 활성화하고, 다양한 동영상 자료를 접할 수 있게 수업을 쇼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틀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는지 고민한 뒤 다음 시간에 다시 설명한다”고 말했다.

 스마트 수업이다 보니 중간·기말고사의 모습도 독특하다. 중간고사를 위해서는 PC 방이나 자기 집에서 인터넷에 접속해야 한다. 그래도 커닝은 불가능하다. 접속한 시간부터 55분간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시험문제 170개가 학생 개별로 무작위로 배열되기 때문이다.

# 학생들이 서로 리포트 채점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인 성연진씨는 지난 석 달간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노트북 앞에서 고민해야 했다. 당일 오후 10시까지 심리학과 전공수업인 ‘응용심리학실험’ 수업에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리포트 분량은 A4 용지 한 장이었지만 부담감이 컸던 이유가 있다. 자신이 제출한 리포트가 다음 날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 4명에게 무작위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리포트를 받은 학생들은 월요일 오후 3시 수업 전까지 ‘논지가 참신한가’ ‘글의 구성이 매끄러운가’ 등의 기준으로 채점하고, 300~400자 정도의 코멘트를 달아야 했다. 이른바 동료 평가다.

 교수는 학생들이 과제물에서 제기한 평가와 의문들을 종합해 토론수업을 진행했다. 성씨는 “동료 학생들이 본다는 생각에 더 참신한 관점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며 “같은 주제에 대해 다른 친구들이 고민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수업시간 토론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수업은 박주용 심리학과 교수가 올해 2학기 시작했다. 서울대 인지심리학 연구실에서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 평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LUCEO)을 만들었다. 박 교수는 “동료 과제 평가 방식은 이번에 11명이 듣는 전공 강의에서 처음 실시했지만 향후 대형 강의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수업 하나에 교수만 3명

 서로 다른 전공 분야 교수 3명이 공동으로 강의하는 토론수업도 있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는 2009년부터 1학기마다 시간·생명·문명 등 한 주제에 대해 교수 3명이 강의하는 ‘주제탐구세미나’ 수업을 진행 중이다. 교수들의 토론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팀티칭 수업이다. 3명의 교수의 역할은 정해진 날마다 강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교수가 수업할 때 다른 두 명의 교수는 학생과 같이 강의실에 앉아 다른 교수의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여한다. 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학문 분야의 토론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겠다는 취지다.

 지난해 1학기에는 『대항해시대』를 쓴 서양사학과의 주경철 교수, 진화생물학을 전공한 자유전공학부 장대익 교수, 인류학을 전공한 한경구 교수가 수업을 했다. 5주차 수업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주 교수가 “지금과 같은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생긴 것은 근대 이후부터”라고 했다. 그러자 진화학자인 장 교수가 “수렵시대부터 낭만적 사랑이 존재했다는 근거들이 있다”며 주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스마트 기기를 활용해 해외 학자들을 강의실로 불러 화상 토론을 하기도 한다. 성균관대 행정학과 박지영 교수가 진행 중인 ‘도시행정론’ 수업이다. 지난 10월 20일 오후 1시 수업에서는 인구 고령화 전문가인 미국 미시간주립대 김승엽 교수를 스카이프로 연결했다. 미국 시간으로는 오후 11시였다. 스크린에 나타난 김 교수는 자택 컴퓨터 앞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성균관대 학생들에게 짧은 강의를 진행한 후 토론했다.

# 현금 주고 창업 체험 수업

 실무만으로 구성된 체험형 수업도 늘고 있다. 지난달 초 한양대 캠퍼스 곳곳에 ‘스티커 학생증’이라는 제목의 전단이 나붙었다. “단돈 1500원을 내면 기존 카드 학생증의 전자출결기능, 도서관 출입기능, 교통카드 기능을 담은 스티커를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지갑을 날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식에 금세 입소문이 퍼졌다.

 학생들이 겪는 작은 불편을 스티커 학생증 사업으로 발전시킨 건 ‘테크노 경영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다. 공대 학생들은 누구나 들어야 하는 기초필수 과목인 테크노 경영학 수업은 이공계 학생들이 경영학적 지식과 경험을 몸으로 익힐 수 있게 하기 위한 한양대만의 독특한 수업이다. 매학기 450명 이상이 듣는 이 수업의 백미는 ‘5만원 프로젝트’다. 학생들이 조를 이뤄 자본금 5만원으로 각자 사업을 시작하고 수익을 얻는 것이 프로젝트 목표다.

글=이상화·장혁진·윤정민 기자 sh9989@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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