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상 경남북 거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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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시조 배현경은 홍유·신숭겸·복지겸·유긍필과 함께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의 난세를 평정하고 최초의 통일왕조 고려를 개국한 원훈이자 명장.
원래 이름은 백옥삼이었다고 한다. 담력과 용맹과 지모가 뛰어나 졸병에서 몸을 일으켜 장군에까지 이르렀다.
처음 궁예를 섬겼으나 폭군으로 변신하자 신·홍·유·복등과 함께 왕건에게 혁명을 권유, 궁예를 내쫓고 고려조를 열었다.
고려가 도읍을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길 때는 개주도체찰사가 되어 새서울건설에 큰 업적을 세웠고 벼슬은 대상항리조상서겸순군부령도통병마대장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뒤 무열공의 시호가 내리고 태조묘에 배향되니 배씨가문은 고려의 문벌로 확고한 터전을 굳혔다.
후대에 내려오며 걸출한 후손이나 세거지를따라 분성(김해)·성주·달성·흥해등으로 파가 갈려 더러는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도시조는 모두 배현경으로 모셔 그는 배씨의 유일시조가 된다.
「개국공신의 후예」였던 만큼 배씨들은 고려조에서 융성을 누렸다.
고종조에 병부상서를 지낸 배원룡, 10세에 군에 들어가 17세에 중낭장이 됐던 배정지, 충렬왕 때 간북면병마사를 지낸 그의 아들 배천경등이 고려사에 특기된 명신들. 삼별초난의 주모자 배중손은 고려무사의 투혼을 보인 무장. 신라·고려 개국공신의 후예인 배씨는 조선조 개국에도 원훈으로 참여, 「새시대」를 여는데 앞장선 기연을 맺고 있다.
신라의 지타공, 고려의 배현경처럼 조선개국에 원훈이 된 배문의 인물은 배극겸. 이성계와 함께 요동정벌에 출정했다가 위화도회군에 동참했고 개경에 돌아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새 왕조를 여는데 주동적 역할을 해 조선개국과 함께 개국l등공신에 오르고, 성주백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조에서 배씨는 모두 47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의 영의정, 1명의 대사간, 2명의 직제학을 냈다. 개국원훈의 후손으로서는 부진한 느낌이 없지않으나, 이는 배씨들이 시조대부터의 무골기질을 이어 문관우위의 조선사회에서 계속 무반으로 더 많이 진출한 영향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등에서 공을 세운 배대웅(후에 병조참의), 역시 임난에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장군을 도와 한산대첩등에서 많은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에까지 오른 배흥립, 수사를 지낸 그의 아들 배시량,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주장하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군을 뒤쫓아 철령에서 싸워 이기고 계속 추격해가다 안변에서 복병을 만나 전사한 열혈한 배명순(영장·병판추증)등이 배씨가문의 무인기질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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