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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2)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35) 장창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46년1월14일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동시에 미군정은 그때까지 방임해두었던 각종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렸다.
미군정장관 「러치」(Archer I. Lerch) 소장에 의해 1월21일 군정법령제28호로 공포된 사설군사단체해산령은 『국군준비를 위한다는 명목의 사설단체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국방경비대만이 유일한 군사단체』라는 선언이었다.
해방후 한꺼번에 분출한 우리겨레의 자기표현 요구는 군사방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정청의 조사에 따르면 해방 3개월뒤인 11월 현재 각종 정당·단체가 2백5개인데 그중 30여개가 군사단체로 나타나있다.
주요한 단체를 열거하면 ▲조선임시군사위원회 치안대총사령부 ▲보안대 ▲학도대 ▲치안특별감찰대 ▲조선국군준비대 ▲학병동맹 ▲학병단 ▲조선국군학교 ▲한국장교단군사수뇌회 ▲대한무관학교 ▲육군사관예비학교 ▲광복군국내지대 ▲육해공군출신동지회등 10여개가 넘는다. 이름만 있고 활동은 없는 단체도 많았다.
나는 귀국후 오광선장군이 이끌던 광복군국내지대에 잠시 참여했다가 12월5일 군영개교와함께 입교했었다.
이같은 군사단체들은 곳곳에서 일본경찰서를 접수, 무장하고 치안유지에 나서는등 군웅할거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발족당시부터 은연중 나타났던 좌·우익의 이념대립은 12월17일 모스극바 삼상회의를 계기로 신탁·반탁으로 표면화해 정면 충돌, 건군열은 무장혈투로 번졌다.
가장 먼저 조직이 결성된 군사단체는 좌익계의 조선국군준비대다.
학병출신 일군소위인 이혁기(경성제대출신·월북) 박승환(월북후 북괴항공부사령관역임) 등이 중심이었다.
해방 이틀후인 8월17일 교동국민학교에서 「귀환장병회」를 발족시킨 다음 8월말께 별도 결성된 「귀환군인동맹」을 통합 발족했다.
총사령에 이혁기, 부사령에 박승환을 뽑고 명동의 전 증권거래소건물을 접수,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현육사인 태능의 일군지원병훈련소를 자신들의 훈련소로 사용했다. 각도에 지대를 설치하고 6만의 대원을 포섭하여 1만5천명을 훈련시키는등 한때 가장 강력한 조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곧 이혁기·박승환등 지도부의 좌경색채가 드러나 민족진영과 충돌 분열됐다.
당시 장안을 주름잡던 뒷골목의 왕자 김두한씨(전국회의원·작고)는 우익의 전위로 휘하의 2만 청년대를 이끌고 국군준비대타도에 앞장섰었다.
김두한부대는 소총·기관총등으로 무장하고 명동의 준비대본부와 태능의 훈련소룔 습격했는데 준비대 경기도지부가 반격해와 태고사근처에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미헌병대가 출동, 진압하고 김두한부대를 무장해제시켜 압수한 무기는 기관총7자루, 소총70자루나 됐다.
우익진영에서는 광복군출전 오광선장군이 45년9월부더 광복군국내지대편성에 착수했다. 또 일본육사출신들은 8월22일 귀국한 이응준장군을 중심으로 조선임시군사위원회 치안총사령부를 발족시켰다.
일군대주급원로인 이장군외 김석원·신태영·백홍석·이대영·박승분·김준원·유승렬(유재흥장군의 아버지)·안병범선생등 일본육사출신들이 한데 모였다. 본부는 당시 경기여고(현창덕여고)에 두었다.
당장 치안확보의 중요성에 비추어 치안대총사령부를 설치, 치안유지에 나서는 한편 일군출신장병들을 규합했다.
일군 가운데도 학병출신들은 별도로 움직여 9월1일 학병동맹을 조직했다. 9월8일엔 종로경찰서를 무혈 접수하기도 했으나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곧 종로서를 포위, 경찰서를 다시 일본경찰에 넘기도록 했다.
학병동맹의 종로서접수에 자극을 받은 우익의 치안대총사령부측에서는 같은날 밤9시께 학병출신 소위인 이치업이 행동대인 연전중대를 이끌고 성북서를 접수하러 갔다가 일본경찰의발포로 안기창·이인제 2명대원이 피살되는 사건도 있었다. 강문봉장군이 지휘한 일대는 매일신문사(현서울신문사)와 경성방송국(정동)을 무혈접수했으나 일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는등 혼란이 계속 됐다.
학병동맹은 위원장 왕익권과 이춘영·박진동등 간부들이 좌경 색채를 드러냄으로써 양분,우파학생들은 12월16일 별도의 「학병단」을 조직했다. 총사령에는 안동준씨(준장·전국회의원)가 추대되었다.
좌우대립의 피날레는 1월18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전국학생총연맹주최 반탁성토대회가 끝난뒤 서대문에서 찬탁측의 좌익학병동맹과 학련측이 충돌한 사건이다. 양측이 권총사격과 곤봉을 휘두르는 난투극 끝에 학병동맹 군사부장 박진동이 죽고 27명이 다쳤다.
사실군사단체 해산령은 이같은 과도기적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종지부인 셈이었다. 국군은 어느 군사세력도 아닌 미군정의 설계에 따라 태동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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