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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19〉 마리 앙투아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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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남겼다고 회자되는 말이다. 이 말 한마디로 그는 민중의 아픔엔 눈꼽만큼 관심도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로 각인됐다.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분노를 사 혁명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가 특별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더러 큰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케이크 발언 역시 사실무근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프랑스 혁명을 불러온 희대의 악녀인지, 아니면 비운의 왕비였는지 교과서와 사료를 통해 알아봤다.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1770년 15살 어린 나이에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죽고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됐지만 38세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합은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정략 결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안한 결합이었다. 두 나라는 오래 전쟁을 치러온 앙숙관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 계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양국 간 원한은 뿌리 깊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악의적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여러 연인을 두고 혼외정사를 벌이는 음탕한 여자,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등 갖가지 추문에 시달렸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두 나라 간 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첩자 혐의를 받기도 했다.

 1793년 10월 15일 혁명재판에선 이외에도 온갖 혐의가 거론됐다. 정부의 부패와 재정낭비는 물론 반역죄, 그리고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까지 덧씌워졌다. 루이 17세가 겨우 7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요된 거짓 증언일 가능성이 크다. 재판은 형식적이었고 물증은 없었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앙시앙레짐)의 모순에서 비롯됐다. 비상교육은 “인구의 2%에 지나지 않았던 제1 신분 성직자와 제2 신분 귀족이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토지의 40% 정도를 소유했지만 세금 부담에서 많은 특혜를 누렸다. 반면에 절대다수인 제3 신분의 평민은 잡다한 세금과 봉건적 의무의 부담에 허덕였다”고 설명한다. 농민의 생활은 처참했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무렵에는 연이은 흉년으로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국가 전체가 불황에 빠졌다.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등 국민경제는 도탄에 빠졌다.

 때마침 유럽인의 세계관은 변하고 있었다. 교학사는 “17세기 과학 혁명은 유럽인의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 혁명은 신(神)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경험과 관찰, 이성으로 자연계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적었다. 천재교육은 “계몽사상이 시민 사회에 활발하게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낡은 제도를 타파하고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미국이 독립을 쟁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프랑스 사람들의 정치 변혁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고 기술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왕정의 재정 위기가 심화하자 루이 16세는 각 신분의 대표자 회의인 삼부회를 소집한다. 제3 신분인 평민 대표들은 구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주장했지만 루이 16세는 이들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성난 민중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방위군을 조직해 국왕의 군대에 맞섰다. 농촌에선 농민들이 영주의 성을 습격하여 장원 문서(소작농의 경작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불태웠다. 혁명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지방마다 혁명 정부가 세워졌다. 8월엔 시민계급과 몰락 귀족 일부가 중심이 된 국민의회가 생존권, 사상과 표현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권 등을 천명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선포한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프랑스 혁명을 불러온 직접적 원인은 프랑스 왕실의 재정파탄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이래 상비군을 창설하고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게다가 베르사유 궁전 건축으로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경제가 파탄 지경이었음에도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 등 전쟁은 계속됐다. 급기야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면서 재정 파탄은 절정에 이른다.

 민중의 분노는 왕실을 향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의 주범으로 몰렸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악의적 평판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이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 없음이 밝혀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전 상궁이었던 캉팡 부인 회고록을 보면 “루이 16세는 이 목걸이를 왕비에게 선물하고자 했으나, 왕비는 필요하지 않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재판 결과를 믿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걸이를 원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왕실을 향한 분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로 쏠렸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대 왕조와 비교할 때 특별히 더 사치스럽지 않았다. 루이 15세의 정부(情婦)였던 마담 뒤 바리가 사용했던 도자기 티세트는 현재 가격으로 수천만원을 호가했을 정도다. 무절제한 낭비는 역대 왕조 모두 껴안고 있던 문제였던 셈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썼던 왕실 예산은 프랑스 전체 예산의 3%인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중 10% 정도만 썼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재정 파탄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무리한 대외전쟁과 경제정책의 실패, 역대 왕조의 낭비가 누적됐던 결과였다. 검소한 왕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적국의 여자 … 왜곡된 이미지

지금도 회자되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는 말은 당시 혁명군이 악의적으로 부풀린 말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사회 계약설로 유명한 루소의 『참회록』에 처음 등장한다. 루소가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의 “빵이 없으면 파이 껍질이라도 갖다주라”는 말을 인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책에서는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에 마음 아파하는 왕비의 측은지심을 표현하기 위해 나온다. 마리 테레즈가 마리 앙투아네트로, 측은함의 표현이 철없고 인정머리 없는 모습으로 왜곡돼 대중 속에 퍼진 거다.

 왕실을 향한 분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쏠릴 때 왕실이 민중의 신뢰를 잃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1791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다 발각돼 파리로 압송된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됐고 민중의 왕실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다. 그나마 일부 남아있던 혁명군 안의 친(親) 국왕파 세력도 이를 계기로 돌아서게 된다. 이듬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다시 벌어졌다. 프랑스는 연이어 패배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친정 오스트리아에 정보를 넘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민족주의 열기로 가득했던 프랑스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를 꼬드겨 프랑스를 적국에 팔아 넘긴 반역자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혁명은 대개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잔혹하다. 교학사는 “1793년 과격파 자코뱅파의 수장인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주도했다 … 공포 정치는 1년 사이에 1만7000명을 단두대로 보냈고, 지방 반란 집압 과정에서 수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고 적었다. 절대왕정의 몰락과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로 보내졌다.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 면모가 재조명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쏜 활에 맞은 농민을 손수 치료해주기도 했고, 마차를 몰 때 소작농 밭을 망치지 않도록 밭을 비켜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감자의 전파에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감자는 악마의 열매로 취급당해 포로나 짐승에게나 먹이던 음식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의 효용에 주목했다. 궁정 안에서 감자를 경작하며 감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 했고, 대중이 감자를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감자꽃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에 오르던 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자신(농민)의 불행에도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글=정현진 기자 자문=중동고 김경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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