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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노래밤·노래바는 또 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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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반년 전쯤 서울 강남 골목에서 재미있는 업소 간판을 본 적이 있다. 얼핏 봐 '노래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 노래밤'. 노래방이 아닌 노래밤이었다. 그땐 글씨를 잘못 썼거니, 여겼지만 을지로.남대문 부근에서 노래밤 간판을 몇 차례 더 목격하면서 오기(誤記)가 아님을 알게 됐다. '신종 업태가 생겼나'. 강남 지역의 구청 간부에게 물어봤더니 그의 얘기는 이랬다.

"노래밤은 대개 단란주점이나 룸살롱 같은 유흥주점이다. 취객이 노래방으로 착각하고 들어오게 받침 하나만 바꾼 것이다. 노래장.노래바.노래빠 등을 쓰기도 한다. 지난해 강남에서 한두 곳이 간판을 바꿔 달더니, 이제 서울 전역으로 퍼졌다. 일반 유흥주점보다 더 퇴폐적인 곳이 있고, 취객을 현혹해 주머니를 터는 변태영업이기는 하지만 마땅히 단속할 근거는 없다."

유흥주점 면허를 어렵게 받아낸 룸살롱 업주 등이 술을 팔지도, 접대부를 두지도 못하게 돼 있는 노래방 흉내를 내는 까닭은 뭘까.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유흥주점 경기는 거의 죽었다. 집중 단속대상이 되면서 손님들이 불법 노래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노래방에서 접대부를 두고 술을 파는 퇴폐영업을 해도 단속당하지 않는데, 룸살롱 장사가 되겠나. 나도 노래밤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서울 을지로의 ××노래밤 주인)

요즘 '불법 노래방 규탄'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천.마산.대전.울산.서울 등지에서 이미 열렸거나, 일정이 잡혀 있다. 시위자는 유흥주점 업주.종업원이다. '노래방의 불법영업이 확산되면서 비싼 세금을 물어야 하는 유흥주점의 40%가 최근 휴폐업했다. 단속 공무원과 노래방 업소의 유착, 솜방망이식 처벌이 이를 부추긴다. 허가업소는 망하고 불법업소는 흥하는 현실을 바로잡아 달라'(유흥음식업중앙회 인천시지회 건의문). 유흥주점 업주의 입에서 '유착'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판이니, 유흥업계의 살벌한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오는 9월로 1년을 맞는 성매매특별법은 유흥업계의 지형을 흔들어 놓았다. 업주뿐만 아니라 성 매수자에 대한 처벌.단속이 세지면서 집창촌의 불빛은 하나둘씩 꺼져갔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인권 유린 사례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유흥업계의 질서는 더 허물어지고 퇴폐 행위가 생활 주변에 교묘히 파고들었다. 우리의 남편.아내.자녀가 퇴폐 영업과 접할 가능성은 커지고 단속이 더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유비쿼터스 성매매 시대'라는 말이 나올 판이다.

유흥가는 몰라도 주택가에 있는 노래방의 대다수는 아직 건전하게 영업하고 있다. 하지만 주택가를 노리는 것은 일대일 매춘이다. 아파트 단지에 세워둔 차에 '출장 마사지' 명함이 끼어 있고 학교 주변 전봇대에 반나체 여성의 모습이 담긴 홍보물이 버젓이 붙어 있다. 서울 도심에는 '섹스방'이라는 신종 업종까지 등장했다. 겉으로는 유흥주점이나 노래방이지만 사실은 집창촌의 영업 행위가 그대로 벌어지는 곳이다. "지난해 말 성매매 여성 등이 소도시나 농촌으로 몰려들면서 쇠퇴해 가던 티켓다방이 되살아났다. 이전과 다른 점은 성매매 여성이 업주와 '자유 계약'을 맺고 알아서 영업을 하는 것이다."(경기도 지역의 경찰 간부)

10년 전 호주.뉴질랜드를 여행할 때 행인들이 거리에 담배꽁초를 스스럼없이 버리는 걸 보고 의아해한 적이 있다. 당시 안내인의 얘기는 이랬다. "보이는 곳에 버리는 것은 OK. 청소부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리면 범칙금. 처리하기 어려우니까." 성매매특별법 시행이 '보이는 퇴폐'는 없앴지만 '보이지 않는 퇴폐'는 키웠다면 성공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부와 지자체는 기준을 세워 불법.변태 영업을 하루속히 정리해야 한다. 적어도 법 시행 전보다 사회가 더 타락했다는 평가는 받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이규연 탐사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