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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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망 진단에 관한 논의는 아직도 의학자들의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미국의 검시 의학자인「A·칼튼」박사와 같은 사람은 3만 명의 사망진단 가운데 적어도 1명 꼴의 오진이 있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물론 미국의 경우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는 놀라운 통계가 제시되고 있다. 프랑스의의학자인「장·스페아르망」에 따르면 지난 2천년동안 유럽에선 4백만 명의 사람이 산채로 땅에 묻혔다. 사망의 검진에 의한 희생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역시 사망을 확인하는 완전한 기술적 판단의 기준은 없다. l968년 시드니에서 열렸던 국제의학회총회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총회에서 채택된「시드니 선언」은『현재 가장 유효한 유일의 진단장치는 뇌파계 뿐』 이라고 밝히고 있다.「뇌사」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의학용어로는「브레인 데드」(brain death)라고 한다.
요즘 미국 라스베가스의 병상에 절망적인 상태로 누워있는 권투선수 김득구는 바로 이 브레인데드의 진단을 받고 있다. 의학적으로는 죽음의 상태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심장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시드니선언이전의 의학적 소견으로는 생존해있는 상태다. 죽음이란 참 얼마나 델리키트한 문제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뇌사란 뇌에 피가 공급되지 않으며 따라서 산소결핍에 의해 그 기능이 멎은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의 의학자들이 심장 정지에 의한 사망 판정보다 뇌사를 최후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장은 피를 공급하는 펌프에 불과하고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지켜주는 것은 뇌라는 생각이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는 뇌의 죽음, 또는 복원 불능한 상태는 설령 심장이 움직이고 있어도 사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나 독일의 의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바로 김득구 선수가 누워있는 네바다주법도 뇌파가 멎은 지 72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사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판정의 결과가「죽음」이고 보면 그 현실은 사뭇 심각하다. 결국 죽음의 관점은 의사가 아니라 그 혈육이 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역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다.
미국에선 지난 70년대에「살 권리」와「죽을 권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분분했었다.
1975년 미국뉴저지주 최고법원은7개월 째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가런·앤·퀸런」양의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앉았다.
이때 부모들은 오히려 안락사를 원했고, 의사들은 거부했다.
역시 결론은 없다. 생과 사의정의는 의사가 판정하고, 가장 가까운 혈연이 그것에 승복하는 수밖에 없다. 의학자들의 보고서엔4시간이나 뇌파가 정지되었다가 소생한 사람의 얘기도 있다. 김득구 선수의 경우에도 그런 이변이 없으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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