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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9. 전쟁, 이젠 잊어도 좋을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1999년 6월 15일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155t급 북한 경비정에 ‘충돌작전’을 펼치고 있는 우리 해군 고속정(위) .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 때 북한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침몰한 참수리 357호 고속정을 인양하고 있다(아래).

“표적(북한 함정)에 락 온(Lock on) 상태를 유지하라.”“적이 사격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격파 사격하라.”

1999년 6월 15일 오전. 박정성 2함대사령관은 해군전술데이터시스템(KNTDS)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박 사령관은 연평도 북쪽 해상에 출현한 북한 경비정이 최고 속력으로 북방한계선(NLL)을 향해 남진하자 이 같은 긴급명령을 내렸다. 락 온 상태는 함포의 조준점을 적 함정에 맞춰 놓는 것으로 레이더가 표적을 추적해 자동으로 조준된다. 얼마 후 북한 경비정에 탄 저격병의 선제사격으로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우리 측은 1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북한은 사망자 95명을 포함, 15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14분 만에 우리 해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지만 이날 전투는 전면전 일보 직전까지 갔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해군은 초계함(1200t)의 함포 사격으로 북한 경비정 2척을 침몰시킨 뒤 나머지 경비정을 추격했다. 해군 함정이 NLL까지 쫓아가자 북한군은 해안에 배치된 실크웜과 스틱스 지대함미사일이 발사 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은 즉각 포착됐다. 북한이 미사일로 보복하면 대기 중인 우리 공군기가 북한 미사일 기지를 공격할 태세였다. 그러면 북한 전투기가 다시 대응, 전장이 순식간에 확대된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정부는 우리 함정의 추격 작전을 즉각 중단시켰다.

연평해전에 이은 남북 간 전쟁 위기는 다음해 3월 북한의 새로운 해상경계선 및 서해 통항질서 발표로 최고조에 달했다. 군 고위 관계자는 “그때 전쟁하는 줄 알았다”라고 회고한다. 북한은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가 포함되는 해상을 북한 측 관할수역으로 선포하고,‘결정적 조치’를 경고했다. 그러나 우리 군을 이를 무시했다. 또다시 NLL을 침범해 우리 함정이나 민간 선박을 통제하거나 공격하면 무력으로 대응키로 했다. 연평해전 때 소극적이었던 미군도 긴장했다. 한·미 해군 함정과 공군 전투기가 비상대기했다. 결국 서해 상공에서 남북 공군기가 대치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됐지만 손에 땀을 쥐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연평해전에서 대패한 북한 해군은 3년 뒤 서해교전에서 설욕했다. 북한은 연평해전에서 패전한 강병호 사곶전단장을 교체하지 않았다. 보복심을 북돋기 위한 차원이었다. 사기진작용으로 사곶전단에 소고기도 지급했다고 한다. 특히 서해교전 직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부대를 순시하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3∼4 차례의 실전 해상훈련도 실시했다고 한다.

드디어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어오자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밀어내기’라는 당시 작전예규에 따라 150m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북한 경비정은 먼저 357호의 지휘실을 집중 공격해 기능을 마비시킨 뒤, 미리 준비해둔 대전차 로켓포(RPG-7)로 통신실에 사격, 화재를 일으켜 침몰시켰다. 철저히 계획된 기습이었던 것이다.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실제상황입니다” → 쌀·라면 사재기… 옛 이야기 되려나

▶ 1983년 귀순한 이웅평 북한 공군 대위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그는 2002년 5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55분. 갑자기 전국에 사이렌이 울렸다.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인천이 폭격당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실제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의 이런 라디오 방송이 5분여간 지속되자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주부들은 동네수퍼로 내달렸다. 평소 두부 한 모도 배달시키던 주부들이 라면 한 상자, 혹은 20kg짜리 쌀포대를 번쩍번쩍 들어 날랐다고 한다. 일부 주부들은 쌀통을 열어보고 나서 바로 라면의 개수를 세기도 했다. 우유·밀가루도 사재기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날 방송은 오보가 됐다. ‘인천 폭격’이 아니라 북한 공군의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를 타고 귀순한 것이었다.

이런 사재기는 남북 관계가 극도로 긴장될 때마다 벌어졌다. 94년 6월 북핵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국민들이 판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수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민방위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주가가 25% 하락했다. 쌀·라면·양초 등에 대한 사재기도 여지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선언해도 무덤덤해졌다. 99년과 2002년 두 차례의 해상 교전때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전후로 벌어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조성 등 일련의 남북 화해 분위기가 가장 큰 요인이다. 물론 이런 흐름은 우리의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보 측면에서의 허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부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고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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