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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8. 침투,파괴,살상… 도발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68년 1ㆍ21사태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북한 124군부대 소속 특수부대원 31명 중 생포된 김신조씨가 경찰에 연행돼 몸수색을 받고 있다. 26명은 사살되고 1명은 자폭, 2명은 도주했다. 당시 보도사진전 은상을 수상한 중앙일보 특종 사진.

푸에블로호 피랍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첩보활동 중 북한에 피랍된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손을 든 채 끌려가고 있다.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는 그해 말 미국에 송환됐다.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8년 10월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사살된 무장공비들을 군인들이 살펴보고 있다. 그해 12월 28일까지 벌어진 대간첩 작전으로 120여 명의 공비 중 115명이 사살됐다.

땅굴 침투 기도
1975년 3월 19일 철원 북방에서 발견된 제2땅굴을 군 수사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이에 앞서 74년 11월 15일에는 고랑포에서 제1땅굴이 발견됐다. 이후에도 북한이 남침용으로 구축한 땅굴이 2개 더 발견됐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병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유엔군 병사들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당시 유엔군 병사들은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이었다. 이 당시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 등 미군 2명이 사망했다.

미얀마 아웅산 묘 폭파
1983년 10월 9일 북한 공작원들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미얀마(버마) 아웅산 묘소를 폭파해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했다.

KAL 858기 폭파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폭발했다. 정부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사고 직후 김승일은 자살하고 김현희는 체포됐다. 김현희가 자살 방지를 위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수사요원들에 의해 압송되고 있다.

잠수함 침투
1996년 9월 18일 강릉에 침투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22전대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해안에 좌초해있다. 잠수함에 타고 있던 승조원 중 25명이 사살됐고 이광수가 생포됐다. 당시 군경과 민간인 1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다.

▶ 1968년 4월 1일 대전에서 열린 향토예비군 결단식에서 여성 대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68년 3월 한 달간 전국에서 1만702명의 여성들이 예비군에 자원했다.

▶ 문세광

1. 무장공비 서울에 나타나다
박정희 ‘이에는 이’… 예비군과 실미도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휴전하의 가상적 평화를 진정한 평화로 생각하며,우리가 처한 냉엄한 현실에 눈을 가리고 살아 왔습니다.”

1·21 사태가 발생한 지 두 달을 조금 넘긴 1968년 4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예비군 창설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향토예비군의 시작이었다.

북한 무장공비가 대통령을 암살하러 청와대 인근까지 들이닥쳤던 충격은 ‘제2 지상군’의 편성으로 이어졌다.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박 대통령은 68년 2월 7일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재향 군인을 무장시켜 온 국민이 무장공비를 격퇴토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육군본부에는 예비군부가 만들어졌고, 각의는 향토예비군설치법 시행령을 통과시켰다. 이어 전국 경찰서나 구청에는 예비군 대대본부가 설치됐다. 북이 칼을 들이댄다면 우리도 방패로 막겠다는 식의 생존 경쟁이었다.

예비군은 창설 그해부터 공비를 잡으러 출동한다. 이승복군이 살해당했던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울진·삼척·양양·봉화의 예비군이 투입됐다. 국방부 동원국에 따르면 예비군은 창설 이후 89회에 걸쳐 연인원 429만여 명이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공비 사살 85명,생포 14명의 전과를 올렸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신체 건강한 장정이라면 누구나 3년 안팎의 전투 훈련을 받아야 했던 한국적 현실이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1·21 사태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진다.그러나 대한민국의 예비역들은 여전히 예외없이 예비군으로 편성된다. 제대 4년차까지는 동원 예비군으로, 5∼8년차는 향방 예비군으로 이들에겐 매년 훈련통지서가 날아온다.

예비군은 한국적 현실로 굳어졌지만,실미도 부대는 비극적으로 끝났다.‘68년 4월’ 우리가 당한 만큼 보복하기 위해 특수 부대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684부대’다. 남파된 124군 부대원 숫자에 맞춰 31명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실미도로 들어가 특수 훈련을 거듭한다. 공식 편제에 없으니 정식 군인 신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 상황이 급변했다. 70년 8월 15일 박 대통령은 남북이 평화적인 체제 경쟁에 나서자는 ‘평화통일 구상’을 선언했다. 실미도 부대는 존재 가치를 잃었다.

71년 8월 23일 실미도 북파부대원 24명은 기간병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와 인천에 상륙했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돌진했다. 그날 오후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4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 역시 군법회의를 거쳐 사형당했다. 잊혀졌던 실미도는 참여정부에서 ‘과거사’로 되살아 났다. 국방부 의문사조사위원회는 30여 년이 지난 현재 실미도 부대원의 모집 과정과 인권 유린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채병건 기자

2. 광복절의 총성
문세광 사건 아직도 의문투성이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도 희대의 대통령 저격사건이 있었다.이른바 ‘문세광(사진) 사건’. 총격전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숨졌다.

사건의 충격이 컸던 만큼 의혹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도 회자되는 것 중 가장 큰 미스터리는 ‘과연 문세광이 쏜 총알이 육 여사를 명중시켰을까’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당시 현장 비디오를 판독해 보면 문세광이 쏜 다섯 발 중 한 발은 연단 위 천장을 맞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허벅지와 연단·태극기 등을 쏜 세발과 불발탄을 제외하면 남는 건 단 한 발. 그런데 그 한 발이 천장을 맞혔다면 과연 육 여사는 누가 저격했느냐는 주장이다.

당시 현장에선 모두 일곱발이 발사됐다. 문세광 외에 누군가 두 발을 더 쐈다. 그중 한 발은 경호원이 문세광을 겨냥했다가 빗나가 합창단원석에 앉아 있던 여고생을 맞혔다. 결국 나머지 한 발이 의혹의 핵심인 셈이다. 그 때문에 당시 수사당국 주변에서는 한동안 ‘제2의 저격수’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재일동포 문세광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비표도 없이 접근해 검문을 무사통과한 점,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권총을 숨겨 왔지만 전혀 적발되지 않은 점,일본인 명의의 위조여권에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한 점 등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다.

박신홍 기자

당시 중정간부의 회고
1·21 무장공비 침투 중정은 예상했었다

정부는 1·21사태가 나기 전해인 67년 말 북한 무장공비의 서울 침투를 감지하고 있었다. 65년부터 3~4인조 무장간첩들이 휴전선·해안선 할 것 없이 침투해 왔다. 그런데 이들의 동선(動線)을 살펴보니 서울을 향해 있었다. 특히 67년 1월엔 간첩 3명이 휴전선의 철책선을 뚫고 서울까지 왔다가 체포됐다. 전례없는 동절기 침투였다. 게다가 군사정보 탐지 등에서 뚜렷한 침투목적이 없었다. 심지어 윤락가에 머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결국 중앙정보부는 67년 10월 서울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68년 정초에 북한 게릴라가 서울로 침투할 가능성이 높다.” 이 보고서의 마지막 줄은 “인민전쟁은 이미 시작됐음”이었다. 파란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보고가 끝난 뒤 박 대통령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침묵을 깬 그의 첫마디는 “이거는 전쟁이야”였다. 대통령은 곧바로 국방장관과 3군 참모총장을 안가로 불렀다. 중정 보고를 그대로 듣게 했다.

해를 넘긴 68년 1월 21일 오전 2시, 이 보고를 올린 당시 중앙정보부의 강인덕(전 통일부 장관)씨는 집에서 자다 전화를 받았다. “공비들이 새까맣게 문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강씨는 “북한 게릴라들의 겨울 산악 행군 능력을 잘못 판단한 것이 실수였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3. 아웅산 폭탄테러
전두환씨 ‘3중 행운’ 기적

22년 전인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28분(현지시간·서울시간 낮 12시58분) 미얀마(옛 버마)의 수도 양곤의 아웅산 묘소. 북한 정찰국 소속 특공대원 3명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미리 장치해 둔 폭탄을 터뜨렸다. 이 사고로 서석준 부총리 등 정부 고위관료와 취재기자 17명이 숨졌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 대통령은 폭발 지점으로부터 1.5㎞ 떨어진 곳에서 아직 승용차에 탑승한 상태였다.

전 대통령은 세 가지 행운이 겹치면서 기적같이 화를 면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는 당초 예정대로라면 폭발 당시 현장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날 그를 모시기로 돼있던 버마 외무장관이 당초 예정시간보다 1분가량 늦게 도착하면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전 대통령은 “이런 건방진 ×, 국가원수를 대하는 태도가 이게 뭐야!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10분 넘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다급해진 버마 외무장관이 백배 사죄하자 숙소를 나섰다. 전 대통령의 불같은 성격이 역설적으로 그를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生)’쪽으로 이끈 것이다.

게다가 이계철 당시 주버마대사는 양곤 시내의 교통체증 때문에 수행원들 중 가장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대사 차량 앞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또 그 직후 나팔수가 연습 삼아 나지막이 연습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조금 멀리서 현장 상황을 지켜보던 북한 공작원들이 전 대통령이 행사장에 들어선 게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원격 조종 버튼을 누른 것이다.

사고가 나자 전 대통령은 모든 수행원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고 직후 황선필 청와대 공보수석이 달려나오자 깜짝 놀라며 “자네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귀신이 돼서 나타났느냐”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황 수석이 화를 면한 것도 기적이었다. 이날 아침 영빈관으로 전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러 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여기서 행사장으로 가는 승용차 배정에 문제가 생겨 지체했던 것이다.

전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 착륙 장소가 반나절새 서울공항→김포공항→서울공항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영접을 나가려던 각료들 사이에선 “이거 쿠데타가 난 것 아니냐”는 술렁임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경악을 준 이 사건의 주범은 3명이었다. 신기철 대위는 도주 과정에서 총격전 끝에 숨졌고, 조장인 진모 소좌는 부상을 입고 체포된 뒤 85년 4월 사형이 집행됐다. 진 소좌와 함께 붙잡힌 강민철 대위는 양곤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적극적으로 자백한 점을 인정받아 무기수로 감형됐다. 지금도 양곤의 한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사고 직후 북한은 “한국과 미얀마가 공모해 날조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얀마 정부는 1년 뒤인 84년 유엔총회에 공식 제출한 사건 조사결과에서 “이번 사건은 북한 당국의 명령에 따라 북한인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박신홍 기자

*** 1968년 1ㆍ21사태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북한 124군부대 소속 특수부대원 31명 중 생포된 김신조씨가 경찰에 연행돼 몸수색을 받고 있다. 26명은 사살되고 1명은 자폭, 2명은 도주했다. 당시 보도사진전 은상을 수상한 중앙일보 특종 사진.

*** 푸에블로호 피랍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첩보활동 중 북한에 피랍된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손을 든 채 끌려가고 있다.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는 그해 말 미국에 송환됐다.

***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8년 10월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사살된 무장공비들을 군인들이 살펴보고 있다. 그해 12월 28일까지 벌어진 대간첩 작전으로 120여 명의 공비 중 115명이 사살됐다.

*** 땅굴 침투 기도

1975년 3월 19일 철원 북방에서 발견된 제2땅굴을 군 수사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이에 앞서 74년 11월 15일에는 고랑포에서 제1땅굴이 발견됐다. 이후에도 북한이 남침용으로 구축한 땅굴이 2개 더 발견됐다.

***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병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유엔군 병사들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당시 유엔군 병사들은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이었다. 이 당시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 등 미군 2명이 사망했다.

*** 미얀마 아웅산 묘 폭파

1983년 10월 9일 북한 공작원들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미얀마(버마) 아웅산 묘소를 폭파해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했다.

*** KAL 858기 폭파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폭발했다. 정부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사고 직후 김승일은 자살하고 김현희는 체포됐다. 김현희가 자살 방지를 위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수사요원들에 의해 압송되고 있다.

*** 잠수함 침투

1996년 9월 18일 강릉에 침투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22전대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해안에 좌초해있다. 잠수함에 타고 있던 승조원 중 25명이 사살됐고 이광수가 생포됐다. 당시 군경과 민간인 1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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