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밥과 동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며칠째 이 시간이면 트럼핏과 같은 소리가 동네를 한번씩 맑게 씻어준다.
어제는 집앞쪽에서 들리더니 오늘은 집뒤쪽에서 들려와 빨래를 널다가 골목을 돌아가 보았다.
튀밥을 튀기는 아저씨가 플래스틱 파이프에 구멍을 뚫어 신기하게도 고운가락을 불어내고 있었다.
옛날, 군것질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우리들은 쌀 튀밥도 아닌, 보리 튀밥의 그 미끄러운 감촉도 고소한 맛으로 느끼며, 한 소쿠리씩 들고 다니지 않았던가?
『튀어요! 펑!』하면 귀를 막고 저만큼 도망갔다가 하얗게 연기가 나는 소쿠리 속의 튀밥알들이 맑은 동심을 들뜨게 해 주었다.
오늘 이 아저씨가, 트럼핏 가락으로, 산다는 것에 매달려 꿈도 잊은 아낙을 추억으로 일깨워준다.
어머니가 튀밥 아저씨에게 부탁을 하면, 우리의 차례가 올 때까지 지키고 앉았던 그 옛날이 지금 이처럼 곱게 여울지는 것 처럼 우리 아가도, 예쁜 추억이 되겠다 싶어 쌀을 한됫박 들고 나와 7살박이 보고 지켜 있으라 했다.『아저씨! 이게 우리 것이예요. 우리 것 이렇게 표시했어요.』
딸아이는 우리의 쌀통에 손가락으로 제 이름을 써놓고는 놀기가 한참이다. 하나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제 놀기에 바쁜 아이대신, 둘째를 업고 내가 대신 지켜 앉았다.『튀어요-』 대신, 아저씨는 플래스틱 트럼핏을 뚜우 뚜 불고는 펑 튀어낸다.
고소안 내음.
아직은 뜨거운 열기가 있고, 10배씩은 부풀었음직한 낟알 들….
한줌을 먹어보니 옛 맛은 아니나 앞자락에 가지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동무들에게 한줌씩 주던 생각에, 같은 골목 아이들에게 한줌씩 나누어 주었다.
이 메마른, 서울의 외곽에서 산다는 일에 매달려 있다가 이렇게 잠시 꿈에라도 젖어보는 기쁨이 고맙다.
저녁나절까지 열대여섯번의 트럼핏이 울렸다. 그 소리가 날적마다 옛 기분에 젖어 보지만 딸아이는 튀겨놓은 튀밥도 아저씨의 트럼핏 소리에도 별 감흥이 없는 것 같다.
딸아이가 크면 어느 순간에 어떤 추억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 못내 궁금한 생각이 든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284의9>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