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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임옥상 화가·세계문자연구소 공동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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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고은(1933~ ) ‘비로소’

이 시를 만난 때는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돼서 한창 방황하던 시절이다. 일상생활이나, 예술의 길에서나 웬만큼 적응이 된다 싶었던 차에 IMF 경제 위기를 맞아 기우뚱한 뒤였다. 도대체 안정이 안 돼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시집 『순간의 꽃』에서 우연히 이 시를 발견했다. 짧지만 강력했다. 내가 가야 한다고 설정한 길이 진정 내가 갈 길이고, 가야만 하는 오로지 한길인가. 한꺼번에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면서 일련의 고민이 확 날아가 버렸다. 해가 뜨면서 일순간 안개가 걷히는 듯 머릿속이 맑아졌다.

 모든 일이 종이 한 장 차이 아니던가. 노를 들고 있다가 놓치는 순간, 그래도 배는 물 위에 떠 있지 않는가. 내 맘대로 저어 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다시 한 번 기다리며 물결이 나를 데려갈 곳을 응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새 노를 장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인생과 예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 뒤 기획한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 등 공공미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정리를 본격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를 놓쳤으나 훨씬 튼튼하고 멋진 새 노를 갖추게 되는 전환점을 맞았다.

 단칼에, 한 줄에 끝내주는 시의 힘을 알고 비로소 고은 시인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임옥상 화가·세계문자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