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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쓸데없음의 가치

중앙일보

입력

올봄,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 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 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無用)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 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인문학적 경영' 운운하며 문사철 공부하면 스티브 잡스 같이 떼돈 벌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CEO들께는 죄송하지만, 잡스는 나중에 뭘 하려고 리드 대학 가서 인문학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히피, 외톨이, 괴짜들과 어울려 쓸데없이 놀다가 한 학기만에 중퇴한 후 예쁜 글씨 쓰기에 매료되어 서체학(calligraphy) 강좌를 청강했다.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 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필자가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 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 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 축적이 뒤늦게 화학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공학박사이자 사업가인 후배가 쓸 만한 프로그래머가 없다고 한탄하길래 전국에 명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생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냐고 물었다. 후배 왈, 자기는 중고생 때 단지 재미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독학하여 허접한 게임을 만드느라 날을 새곤 했단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선행학습 하랴 경시대회 준비하랴 바빠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본 경험이 없어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재주가 없단다. 또 어느 교수님에 따르면 요즘 서울대생들 보면 매사에 욕망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 같아 보인단다. 번아웃 증후군일까.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

이번 주말에는 답 안 나오는 스펙의 복학생이 ‘족구 하는 소리’ 말고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하라는 주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족구, 그리고 가망 없는 짝사랑에 열정을 불태우는 영화 ‘족구왕’이나 한번 더 보련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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