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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옷 대신 내가 만들고 싶은 옷을 팝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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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 16면

박종우 디자이너가 만든 남성복 브랜드 ‘99%IS-’의 2014 가을겨울 컬렉션. 헤드피스부터 신발까지 펑크룩을 모티브로 삼았다.
박씨는 스물 한 살 때부터 팬더처럼 눈 주위를 검게 칠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바지 통이 넓은 힙합패션에 무슨 깊은 뜻이 있겠느냐. 그저 좋아서 할 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씨는 올 가을겨울 컬렉션으로 펑크에 어울리는 올블랙을 택했다. 여기에 지퍼·안전핀·스터드(징)를 주요 장식으로 삼아 독창성을 자랑했다. 특히 새로 디자인한 징을 일일이 손으로 박은 재킷은 예술작품에 가깝다는 호평을 받았다.

눈 주위를 팬더처럼 검게 칠했다. 가운데 가르마에 머리는 살짝살짝 보랏빛이 도는 은발로 염색했다. 게다가 온통 검정으로 덮은 옷차림까지-.

제 10회 삼성패션디자인펀드 수상한 디자이너 박종우

패션 디자이너 박종우(30·BAJOWOO)를 길거리에서 봤다면 겉멋만 들었다고 혀를 찰 외모다. 그런 그가 올해 10회를 맞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의 수상자다. SFDF는 제일모직이 글로벌 패션 브랜드 육성을 위해 마련한 디자이너 후원 프로그램. 박씨는 2012년 론칭한 남성복 브랜드 ‘99%IS-’가 도버 스트리트 마켓, 10꼬르소꼬모 등 세계 유수 편집숍에 입점하고 레이디 가가, 저스틴 비버 같은 톱스타들이 찾는 옷이 되면서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펑크록 문화를 패션으로 옮겨낸 디자인은 ‘그 어디에도 없는’ 옷이란 호평을 들었다. 게다가 학생 신분으로 도쿄패션위크에 처음 진출했고 꼼데가르송·매킨토시 등 세계적 브랜드와 협업하는 등 이력도 화려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도쿄에서 이뤄졌던지라 국내에선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셈. 그를 만나 좀더 많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그 역시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였다. 첫 질문으로 “펑크 음악이 패션과 어떻게 연결됐지요?”라고 물었을 뿐인데, 막힘없는 답변이 50분을 넘겼다. 음악과 옷, 그것은 곧 그의 전부로 들렸다.

펑크록에 빠져 펑크 옷을 만들다
모든 건 인디밴드 ‘크라잉넛’의 노래 ‘말달리자’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는 TV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멋있었다. 문법에도 안 맞는 노래 제목을 되뇌었다. 나중에 동네 대학생 누나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을 어디 가면 볼 수 있느냐고. 누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홍대 앞 클럽 이름을 대줬다. 무작정 홍대 앞으로 갔다. 길거리에서 만난 껄렁해보이는 커플은 초등학생 티가 나는 그를 클럽 앞까지 데려다 줬다. 들어가니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나가라고는 안 했다. 주말에만 오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직접 할 수는 없었다. “다루는 악기가 없었어요. 대신 그 문화에는 빠져들었죠. 멋부리기를 좋아했는데 펑크록에 어울리는 옷을 구할 수 없어 리폼을 했어요.” 딱 붙는 체크무늬 바지를 찾지 못해 흰 바지에 매직으로 칠해 입거나, 시장에서 비슷한 무늬의 고무줄 통바지를 사서 수선하기도 했다. 바느질을 못 하니 옷핀을 잔뜩 꿰어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밴드하는 형들의 무대의상을 도맡았다.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지자 그도 장래를 고민했다. 형들은 옷을 해보라고 했다. 집안에선 결사반대였다. 그나마 합의를 본 게 일단 대학교를 가라는 것. 고 3 때 바짝 미술학원에 다녀 지방대 미대에 붙어놓고 패션스쿨인 에스모드서울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응이 힘들었다. 매니큐어를 칠하고 다니는 그에게 교수들은 “왜 그러고 다니느냐”고 혼을 냈다. 패션을 가르치는 곳에서 차림새를 뭐라고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야단을 뒤로 하고 관뒀다. 스타일리스트를 6개월간 꾹 참고 했지만 역시 그것도 아니었다. 이번엔 가죽공장에 들어갔다. “생산 라인에서도 제일 막내였어요. 가죽 더미를 들고 다니며 배달을 했는데, 그래도 신기하게 재미있더라고요. 가죽 만드는 것부터 옷이 나오기까지 다 보니까요. 거기선 일 년 반을 일했어요.”

가끔 가죽 자투리를 홍대 음악실로 가져가 옷으로 만들었다. 음악을 듣지 않으면 입지 말라는듯한 매니어 의상이었다. 2001년 전후 인터넷이 막 상용화되던 때라 미국·태국·프랑스·영국 등지에서 펑크록을 현지 아이들과 음악파일과 사진을 주고 받았다. 그 김에 아예 밴드 티셔츠를 만들었고, 레이블도 달았다. 월급 100만 원에 작업실 임대료가 70만 원인데도 거기에 모두 쏟아부었다.

도쿄패션위크 진출한 첫 학생 디자이너
군에서 제대하고 다시 디자이너로 꿈을 품은 건 2007년 런던행이 계기였다. 이 역시 음악이 발단이 됐다. 1977년 펑크음악이 세상에 나온 해를 기념하며 당시 런던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 분들 살아있을 때 한 번은 봐야지, 그랬어요. 한 달 반을 예정하고 갔는데 재미있어서 6개월을 지냈어요. 거기서 음악 하는 친구들이 하루씩 재워줘서 버텼죠.”

친구들은 그에게 패션학교에 다녀보라고 했다. 그래서 런던의 패션스쿨 세인트 마틴 스쿨에 응시했는데 덜컥 합격. 하지만 막상 가려니 망설여졌다. “학비도 비싸고 나와봐야 돈이 또 들겠구나, 성공하려면 자본과 인맥이 있어야 하는데 안 되겠다 싶었죠.”

그는 과감히 도쿄로 길을 틀었다. 자신이 잘 아는 것, 그리고 잘 하는 것이 펑크와 패션이었다. 이 두 개를 잘 엮어내고 싶었는데, 도쿄는 그 무대로 적합했다. 음악을 상품으로 파는 가게도 많았다.

도쿄의 패션 학교 ‘드레스 메이커’에 입학한 이후 그야말로 물을 만났다. 졸업까지의 목표가 자기 브랜드를 만드는 것인 그곳에서 그는 2학년 때 처음 가죽재킷을 선보였다. 반응이 좋아 하라주쿠에 있는 유명 빈티지옷 가게 ‘베르베르진’에 가져갔다. 오케이 사인을 받고 물건을 내놓았는데 모두 팔렸다. 그 돈을 종잣돈 삼아 2012년 브랜드를 정식 론칭했다.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펑크. 진정한 펑크를 알고 시작하는 펑크록 패션을 꿈꿨다.

“힙합 패션은 점점 멋있어지는데, 펑크의 이미지는 점점 반감이 돼 가는 게 속상했죠. 내가 제대로 된 걸 보여주자, 그랬어요.” 한국 철물점을 찾아 지금껏 없던 징(스터드)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 징들을 일일이 손으로 박았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옷감의 접지 부분들에까지 징이 들어갔다. 고급화된 스트리트 패션, ‘핸드메이드 펑크록 의상’이었다.

이같은 그의 첫 컬렉션은 한국과 일본 편집숍에 깔리고 잡지에 특집 기사가 나갔다. 한국에도 옷을 들고 와 편집숍에 내놓았는데, 그걸 뉴욕 편집숍 ‘오프닝 세리모니’ 구매 담당자가 마음에 들어하며 사갔다. 이런 뜻밖의 수확은 도쿄 패션위크 진출에 자격 조건이 됐다. “학생으로 처음이었죠. 하지만 하지 말라는 조항이 없더라고요. 쇼장도 공짜로 얻고, 학교에서 작업할 수도 있으니 안 나갈 이유가 없었죠.”

행운은 계속됐다. 그즈음 일본 공연을 앞둔 레이디 가가의 스타일리스트가 옷 40~50벌을 호텔로 공수해갔는데, 그중 박씨의 옷이 뽑혔다. 이후 세계적인 스타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또 도쿄·뉴욕·런던에 자리한 유명 편집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입점 제안이 왔고, 영국 클래식 브랜드 ‘매킨토시’에서도 협업 러브콜이 들어왔다.

패션 거장 레이 카와쿠보의 각별한 애정
무엇보다 ‘대형 사건’은 그가 꼼데가르송의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의 눈에 든 일이다. 카와쿠보는 파리 컬렉션에 초청된 첫 일본 디자이너이자, 기존의 틀을 깨는 전위적 의상으로 유명한 인물. 지난해 브랜드의 내부 보고를 통해 박씨의 존재를 알게 된 패션 거장은 그에게 협업을 요청했다. 그는 매킨토시와의 협업이 먼저라는 이유로 ‘아무 생각없이’ 단박에 거절했지만, 카와쿠보는 “무조건 해달라”는 메시지를 다시 보냈다. 그렇게 나온 협업 의상은 모두 팔렸고, 이후 그는 레이를 직접 만나 감사의 인사를 들었다.

“딱 20분을 만났어요. 일본에선 거의 신격화되는 인물인데, 존댓말로 그러대요. 우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첫 협업을 성공적으로 끝낸 그는 이번엔 꼼데가르송에 협업 전시를 제안했다. 올해 도쿄에서 7월 7일 77벌의 가죽재킷을 아트작품으로 선보였다. 레이는 이 특별히 전시에 어울리는 오브제를 만들어줬고, 파리의 꼼데가르송 뮤지엄에서도 이어갈 것을 주문했다. “꼼데가르송의 공장을 써도 좋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도움을 받을 때는 아닌 것 같아서요.” 현재 그는 작업실로 학교 창고를 빌려 쓰고 있다. 그래서 이번 SFDF에서 받은 10만 달러(약 1억1065만원)로 가장 먼저 팀을 꾸리고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됐다. 드라마 같은 극적인 스토리. 하지만 들으면서 냉정한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펑크의 생각과 방식과 문화가 스며든 옷이 과연 얼마나 팔릴 수 있느냐,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이 있느냐는 점이었다.

“세계는 넓으니까요. 펑크를 좋아하고 관심 있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어디에도 있는 걸요. 이 점점들을 모으면 브랜드가 유지 되지 않을까요. 팔리는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고 싶은 옷을 팔겠다는 마음도 그래서 자신 있고요.”

그러면서 그는 브랜드의 의미를 뒤늦게 설명했다. “I am 99% from 1%.” 남들이 1%라 생각하는 매니어의 패션, 하지만 그에게는 99%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제일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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