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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정 많은 수교 형, 대만 가서도 못 잊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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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 왕병승

대만 남자농구대표팀이 11일 부천에서 프로농구 전자랜드와 연습경기를 했다. 몸집 큰 남자가 전자랜드 박수교 단장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형님, 안녕하세요?"

박 단장이 반색을 한다. "야, 너 왔구나."

사나이의 이름은 왕병승(45.작은 사진). 서울에서 나서 자란 화교다. 1980년대 말 실업농구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팬들은 화교 선수들이 활약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명지대-현대에서 뛴 손덕성.왕병승, 성균관대-삼성에서 뛴 서지태가 대표적이다.

왕씨가 나온 한성화교고등학교에는 농구팀이 없다. 78년 여름, 친선경기를 위해 팀을 급조했는데 키가 1m90㎝인 왕씨도 선수로 뽑혔다. '화교학교에 좋은 선수가 있더라'는 소문이 퍼졌고, 어느 날 명지대 정광은(작고) 감독이 찾아왔다. 미국프로농구(NBA)에 진출한 하승진의 아버지 하동기씨가 명지대 79학번 동기다.


▶ 현대 소속이던 1985년 강릉 전지훈련에 참가한 왕병승씨(오른쪽에서 셋째). 왼쪽 끝이 박종천, 셋째가 이문규, 여섯째 박수교, 오른쪽에서 넷째가 이원우, 오른쪽 끝이 방열 감독. 한가운데 젊은 시절의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당시 농구부장)이 서 있다. 이충희는 셔터를 누르느라 빠졌다.

선배들이 자주 때렸다. 여러 번 도망쳤지만 곧 돌아왔다. 매는 싫었지만 농구는 좋았다. 83년 방열 감독의 부름으로 현대 남자팀에 입단했다. 현대에는 신선우.박수교.이문규.박종천 등 스타가 즐비했다. 이들이 대표팀에 불려 가야 왕씨에게도 뛸 기회가 왔다.

"그래도 좋았어요. 훈련 마치고 동기들과 당구 치고 술 마시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죠."

왕씨가 입단했을 때 창단 멤버 신선우는 무릎 부상으로 반 은퇴상태였다. 연세대 시절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준 신선우는 운동을 쉬고 있기에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왕씨에게는 눈길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사는 사람 같았다.

이문규는 후배에게 엄했다. 왕씨는 "명지대 선배인데도 말도 못 붙였어요. 얼마나 어깨에 힘을 줬다고요"라며 웃었다. 현대 입단 후 국가대표로 성장한 이문규는 후배 중에 이충희를 아꼈다. 왕씨는 "스타들끼리 통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성격이 소탈한 박수교와 집이 전남 여천이어서 휴일에도 갈 곳이 없는 박종천 등 후배들과 잘 어울렸다.

"(박)수교 형은 공휴일이나 명절 때 집에 못 간 후배들에게 자주 술을 샀죠. 그 술맛을 대만에서도 못 잊겠더군요"라고 말했다.

왕씨는 87년 은퇴해 대만에 정착했다. 의류사업으로 성공했지만 마음은 늘 친구와 선.후배가 사는 서울에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한국에 온다. 이번엔 대만 농구대표팀 총무 자격으로 왔다. 왕씨는 신선우.박수교 등 선배들이 있는 팀과 경기하는 이번 일정에 꽤 흥분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번 일정은 '추억으로 가는 여로'다.

허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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