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508》<제78화>YWCA 60년(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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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9년 서울Y회관이 건립된 이후 연합Y회관은 새로 짓지 않으면 안되게되었다. 연합Y는 66년까지 일본식 살림집에서 불편하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서울Y건물이 3층으로 옆에 우뚝 서 있는데 비하면 연합Y건물은 너무나 초라했다.
수리를 해도 끝이 없었고 집은 곧 무너질 것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명동성당 바로 건너편에 이같이 낡은 건물이 있으리라고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건물이 낡았다고 해서 연합회 프로그램에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합회 자체의 프로그램으로 큰 강당이 필요하거나 클럽모임이 특별히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낡은 집을 새로 짓지 않을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작년 3월 실행위원회에서 드디어 연합회 회관건립에 대해 정식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회계임원으로 활동한 음악가 채선총씨가 첫 발언을 했다.
그는 연합회의 재정을 맡아보면서 헌집을 간수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연합회는 큰 장소를 곡 필요로 하지않는다해도 자원 확보를 위해서라도 빌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린 아직도 외국으로부터, 특히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 경상비까지 충당하는 실정인데 건물이 되면 이는 제정을 만들어줄 수 있는 큰 자원이 될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제안은 곧 받아들여졌고 창립 45주년 기념사업으로 연합회 회관과 아울러 캠프 건립도 함께 추진하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물론 실행위원 전원이 뛰어야 할일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박 「에스터」 씨가 앞장서야 된다는것을 우린 모두 느꼈기에 『우리 박「에스터」 선생님이 또 한번 크게 수고하여 주실 것을 기대하고 부탁드립니다』고 회장 김신실씨는 전위원을 대표하여 간곡히 부탁했다.
박「에스터」씨는 7년전 서울Y회관을 지을때 고생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었지만 연합회도 회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선생님들이 다 그러한 결심이 되어 있으시다면 같이 힘을 합해 해보도록 하십시다』 라고 답했다.
그해 6월10일 연합회 건축기성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으로는 당시 후원회 이사장이었던 김활난박사. 모금방법으로는 우선 모든 회원이 다만 벽돌 한장이라도 거드는, 전의원 참여를 장려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한편 모금을 하기로 했다.
기업체나 돈 있는 유지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건물의 필요성몰 간곡히 이야기해 설득하기로 한것이다.
우선 명단을 만들어 건축기성회 임원들이 1대1로 찾아가 만나기로 했다. 사실 모금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차라리 내가 돈이 많아 선뜻 내놓고 마는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많다. 선약을 하고 만나려면 잘 만나주지 않거나 또 만나준다 해도 전혀 예상과는 달리 찾아온 사림 그대로 보낼 수 없으니까 몇푼 집어준다는 격으로 주는 경우도 있었다.
박 「에스터」 씨와 이 「마리아」 씨, 채선섭씨등 모금위원들은 낙심하지 않고 계획대로 매일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때 『오늘은 내 손바닥이 가려우니 돈이 들어올 모양이군』하며 우스개 소리까지 하는 여유도 보였다.
그때만 해도 경기가 70년대 같지는 못하던 때라 모금이 수월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건물에 대한 계획이 세워졌고 설계도 되었다. 마루가 딛기만 하면 삐걱거려서 새며느리 같이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던 그 낡은 건물을 헐어내고 그자리 3백46평 대지 위에 지하1충, 지상4층의 1천2백30평 규모의 건물을 위한 기공식도 가졌다 (67년6월).
그러나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으니 어려울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어느 회원 한사람이라도 돈이 많아서 내놓을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고 모금위원들의 수고는 말로 다할수 없었다. 이때 모금 위원으로는 몇해전 부터 이 「마리아」 씨를 중심으로 중년 여성30여명이 클럽을 조직한 일이 있었다.
상록클럽이라고 하여 친목겸 Y재정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그룹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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