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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9)제78화 YWCA 60년-가정법원의 설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국YWCA가 40년 동안 걸어온 발걸음은 빠른 것은 못되지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차근차근 분수를 지키면서 자라날 수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앙·양심·지성이 모여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려한 그 의지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40년 사 편찬 이후 Y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들의 법적 지위, 직장에서의 동등권 등을 시정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62년에 있었던 21회 전국대회에서 채택된 앞으로 2년 간의 프로그램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여성으로 하여금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주지시킨다.
○여성을 차별하는 법률은 고치도록 계속 노력하라.
○가사재판소의 설치를 주장한다.
○계속해서 혼인신고의 필요성을 여성들에게 알려주고 신고할 것을 권장한다.
○공장 등에서 일하는 아동·부녀자들의 환경및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향상시키도록 노력한다.
○직업여성과 아동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는 노동법을 신속히 고치도록 한다.
○여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신민법을 이해하도록 한다.
이상의 사항들을 중점으로 채택하는 즉시 당시 혁명정부 앞으로 친족상속법 개정과 가사재판소 설치의 필요성을 주장한 건의문을 제출했다.
후에 다시 다른 주요 여성단체들(대한어머니회·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대한여학사협회· 여성문제연구회등) 이 연합하여 다시 건의했다.
이는 YWCA 단독으로는 힘이 약할 뿐 아니라 이상의 단체들도 이에 동조할 의사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건의는 효과를 발생하여 가정법원이 설치되었고 가정법원은 그 후 조정으로 많은 가정의 문제들을 해결 해 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가정법원은 사회 각계를 총망라한 인사들을 조정위원으로 위촉하여 문제 있는 부부를 몇 번 만나 사정을 알아본 후 합석하게 하여 어떤 합의점을 제안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다. 초기의 조정위원으로 약7년 간 봉사했던 김정왕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의 경우, 그 때만 해도 개화기와 비슷하게 여성들이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아내가 무식하지만 남편을 공부시키기 위해 뼈빠지게 일해서 공부를 시켰는데 취직하고 나더니 아내를 냉대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잘 안 된다. 대개의 남자는 여자와 맞지 않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감격적인 한 경우를 이야기해 주었다. 말 하나, 아들 하나 있는 젊은 부부인데 부인이 남편에게 성적인 불만으로 다른 남자를 유혹하여 부정한 일을 한 것이다. 남편은 고민 끝에 이 일을 가정법원에 제기하고 조정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씨는 남편 되는 사람에게 물었다. 『아내 되는 이를 지금도 사랑합니까』 하고.
『네,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거죠.』
『그럼 아내를 버릴 생각도 없는 건가요?』『지금 내가 그 여자를 버리면 무엇이 그리 뾰죽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있으니 또 장가를 간대도 버젓하게 가지도 못할 것 아니겠읍니까』 『그렇다면 아내가 부정한 일을 했어도 그대로 견딜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결국 제가 모두 용서하고 다시 결합해야겠죠.』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착하게 생긴 남편이 『가다가 같이 점심이나 합시다』 하며 나가던 일은 꽤 오래되었건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고 김씨는 말해준다.
또 한 경우는 상당한 직업을 가진 남자의 경우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집에서 주선해 신부를 골라 보냈다. 식을 올리고 살림까지 시작했는데 뭔지 이유없이 아내가 싫어졌다.
처음 며칠만 같이 지내고 거의 별거상태로 있다가 둘 다 귀국하여 가정법원에 온 것은 위자료 조정 때문이었다. 신부 쪽에서 요구한 것이 기백만원인데 남자가 주겠다고 하는 것은 1백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를 설득했다. 『미국에서 그만한 돈을 벌자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러나 여자 편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헤어지는 이런 경우에 그래도 최소한의 집 한 채 거리는 돼야 할겁니다(그때 집 값이 15평정도면 5백 만원 하던 때니까 여자 쪽에서 요구한 것이 정당한 것이었다)』
조정위원의 이 말을 수긍하고 남자는 그대로 하기로 했다.
꽤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을 다 하지는 못하지만 대개의 경우 일이 거의 기울어진 후에 가정법원을 찾아오기 때문에 손댈 길이 없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가정법원이 필요한 것이었다고 조정위원들은 강조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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