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③문화] 28. 한국의 지성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40년간 대중문화의 득세 속에서 그래도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켜준 것은 책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성사는 대략 10년 단위로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시대의 전환 이끈 ‘전환시대의 논리’

식민지와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된 이 땅의 사람들은 60∼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미국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가 60년에 발표한 『경제성장의 제단계』는 산업화 시기의 제도권 학계에서 교과서로 읽혔다. 사상계에선 『한국의 사상적 방향』(1968년) 등을 쓴 고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의 영향력이 컸다. 그가 주도해 작성한 ‘국민교육헌장’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분명히 드러낸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했고, 그 중심 사상은 ‘반공’과 ‘민족 중흥’이었다.

이 같은 제도권 흐름의 반대편에 민주화운동의 논리가 자리 잡는다. ‘마르크스’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던 시절 반공·냉전 이데올로기를 건드린 대표작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였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운동권’ 대학생들이 법정 진술을 통해 너도나도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이라고 말해 유명해졌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리영희는 ‘사상의 은사’였지만 정보기관에서 볼 땐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고생하기도 했던 그는 최근 자서전 『대화』를 펴내고 대학생들과의 토론 모임에서 “8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한국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을 다룬 책자에서 내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1977년) 『우상과 이성』(1977년) 등이 상위 1, 2, 5등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책의 폭발적 파급력을 전혀 예상 못했다는 말이다. 그는 또 “사회를 지배하는 잘못된 사상과 관습, 가치관 등을 절대시하는 ‘우상’에 도전하고 파괴하는 것이 이성적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이며 그러한 우상 파괴자로서의 내 임무와 역할을 자진해서 맡아 온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식민지 유산과 냉전 논리의 극복은 당시 지식인들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 점에서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1970년)와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년)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는 일반인들에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학계에는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기 전에 한국이 스스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흐름이 존재했음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이는 일본이 식민지를 통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서서 한국이 자발적으로 근대화를 이룰 역량을 비축하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의 주춧돌이 되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역사관을 제시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80년대를 풍미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근현대사 이해는 이 책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386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세대

79년 10월 첫 권이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전6권)은 80년대 민주화투쟁 시기를 대변하는 책이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이 책의 논리와 유사한 비판적 사회과학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책은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 이해의 흐름을 민중사관 중심으로 바꿔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집필에 참여한 저자만도 수십 명.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사장 등 이미 작고한 인물도 있고, 당시 대학원생으로 참여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는 이제 우리 학계의 중견으로 자리 잡았다.

80년대는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금기가 아닌 시대였다. 사회주의권 책들이 본격 번역돼 나왔으며 북한의 주체사상까지 들어왔다.

주로 번역서를 통해 사회주의 이론을 흡수하던 이 시대에 돌출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년) 은 국내 저자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수준을 과시해 주목을 받았다. 특히 저자가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생인 이진경(현 서울산업대 교수)씨였다는 점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진경이란 이름은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란 말의 앞글자를 딴 가명. 본명은 박태호. 그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너무나 상황이 달라져 지금 생각해 보면 아득하다”면서 ‘한국사회가 어떻다’는 특정한 결론을 제출하려 하기보다는, 이론적 연구 자체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층위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썼다. ‘방법론’이란 주제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고 말했다.

혁명을 꿈꾸던 그 역시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이후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가 다시 선택한 길은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 그것은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의 유행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한 이념적 혼란과 군사독재정권의 붕괴 이후 변화된 현실 사이에서 변혁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했어요. 나는 푸코와 들뢰즈, 가타리를 읽고 수용했으며 이를 마르크스주의와 다시 섞으려고 했지요.”

이 시기엔 또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기도 했다.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6년)는 한국학과 동양학의 붐을 불러일으켰다. 대만대·도쿄대·하버드대를 섭렵한 김 교수가 풀어놓는 동양학 이야기는 그때만 해도 ‘미아리 점집’부터 연상됐던 동양철학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 또 연극·영화·체육·한의학 분야를 마구 넘나들며 보여준 그의 파격적 행보는 서양 주도 학문에 주눅이 들었던 국학계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가 주도한 동양학 붐은 90년대 이후 ‘동아시아 가치’논쟁으로까지 흐름을 이어갔다.

또 하나의 성역 깬 ‘즐거운 사라’

80년대가 돋보기로 사회를 진단했다면 90년대는 현미경으로 인간을 관찰한 시대였다. 사회주의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개인의 일상에 대한 관심이었다.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거대담론보다는 미시적 ‘문화 연구’가 주종을 이뤘다. 이를 주도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들뢰즈와 데리다 등 프랑스 현대 사상가들의 이론이 대거 소개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자리를 대체했다.

마광수 연세대 교수는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년)와 소설『즐거운 사라』(1991년) 등을 잇따라 펴내며 개방적 ‘성(性) 담론’의 시대를 열었고,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성역을 깨뜨리며 표현의 자유와 한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즐거운 사라』를 냈다는 이유로 검찰은 학교에서 강의 중이던 그를 긴급 구속했다. 학교에서도 해직당했다. 그를 비판하는 칼럼이 일간지에 연일 실렸다. 당시 우리 문화계와 학계에서 그는 ‘왕따’였다.

“구속될 때가 41세였죠. 이후 10년은 내겐 ‘잃어버린 40대’였습니다. 당시 판사가 ‘이건 국가적 사안’이라고 했던 말이 특히 기억에 남아 있어요.”이렇게 말한 그는 “야한 소설을 써서 판매금지 당한 경우는 여럿 있지만 저자가 구속된 경우는 세계적으로 내가 처음”이라고 회고하며 “한국 문학은 인간의 외면만 그리거나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데 그쳤다. 나는 윤동주를 소재로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인간의 내면 심리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등은 학술서 『상징 시학』등의 대중적 버전일 뿐이다”고 말했다.

10년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온 그는 올 들어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2003년 나온 『마광수 살리기』란 책도 조금 위안이 됐다. 하지만 “훨씬 더 야한 책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는데도 『즐거운 사라』는 여전히 판매금지 상태”라며 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싱가포르·홍콩·대만 등 이른바 ‘아시아 4룡’의 자본주의적 급성장의 원인을 분석하며 벌어진 ‘동아시아 가치’논쟁도 이 시기의 주요한 특징. 공자의 유교 등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이 현대 자본주의시대와 접목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한국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게 한 계기로 평가받는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1999년)와 김경일 상명대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1999년)는 탈이념화가 더욱 뚜렷하게 전개돼 본격적인 권위파괴 시대가 시작됨을 예고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가공할 제목으로 한국 사회의 유교 문화를 적나라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다. 전통 유림단체들의 비판이 잇따른 것은 물론이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민족주의를 ‘국가주의와 집단적 폭력 논리’라며 비판했다.

2000년대 초반은 혼돈의 시대

2000년대의 초반은 지성사로 보면 혼돈의 시대다. 지식사회에선 세계화가 전지구적으로 퍼지는 현상을 비판하지만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 등이 잇따라 터지며 동아시아에서의 자국 중심적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엔 80년대 진보적 운동권의 전방위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던 보수적 지식인들이 전열을 정비해 대응책을 모색해 나가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바꿔 놓은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다시 보수적 관점으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다.

배영대 기자

문학은 정말 죽었을까

한국 문학의 생사 여부를 놓고 말이 많다. ‘정부가 복권을 팔아 문학을 연명하는 시절’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로또 판매대금에서 52억2000만원을 올해 문학회생 프로그램에 투입한다. 작가에게 직접 돈을 주거나 문학 서적을 대신 사주는 식이다. 시 한편에 40만원, 소설 한편에 200만원씩 작가에게 준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지만 문학은 본래 문화의 본령이었다. 먹여 살릴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문학에 사망 선고를 내릴 수 있을까. 문단은 꼭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문예연감을 보자. 1977년 한 해 발표된 시가 1962편, 소설은 468편이다. 반면 지난해 문학도서 현황을 보면 시집 544권, 소설책 1443권이 출간됐다. 시집 한 권에 시 30편이 실린다면 시는 지난해 1만5000편 이상이 발표됐고, 소설책은 권당 5편으로 계산하면 소설 7000편이 나왔다는 얘기다. 77년에 비해 시 7배, 소설 12배가 늘어난 셈이다.

5월 방한한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서울 한 서점에 나란히 꽂힌 문학잡지를 보고 “일본 문학은 오래 전 죽었다”며 “한국이 부럽다”고 말했다. 일본의 문학 규모가 형편없다는 뜻일 터다. 그러나 한국에선 현재 204종의 문학잡지가 발행되고 있으며(올 4월 기준, 문예진흥원), 문인은 1만 명을 넘는다(시·시조·소설·수필 포함).

오늘날 한국 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수급불균형이다. 쉽게 말해 문학은 쏟아지는데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기 작가 K씨의 예다. 그의 10년 전 소설은 7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러나 최근 발표한 소설은, 문단 안팎의 높은 관심에도 겨우 5만 부를 넘겼다. K씨만의 문제일까? K씨의 신작은 현재까지 올해 한국 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속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인터넷을 위시한 뉴 미디어의 득세로 독서 인구는 분명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할 것이다. 일부는 문학이 아니라 문예지 문학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과거 문예지가 독점한 교양·재미·정보를 이젠 비소설이 대체한다는 것이다. 출판 시장이 다양해지면서 문학의 지분이 축소된 결과란 논리다. 경직된 순수 문학이 요즘 세대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귀여니’로 대표되는 인터넷 소설, 김진명 류의 대중소설, 쿨한 삶을 전도하는 일본 소설 등은 여전히 화제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건 30대 후반 한 인기 작가의 말이었다.

“30년 전 작가는 또래와 경쟁하면 그만이었지만 난 하루키나 마르케스와 경쟁한다. 내 소설은 ‘다빈치 코드’와 싸우고 ‘해리 포터’와 맞서야 한다. 이게 가장 큰 차이다.”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