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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③문화] 27. 언론 통폐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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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열린 언론청문회는 제5공화국이 통폐합한 한국 언론의 학살 현장을 증언했다.

▶ 1980년 언론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기자해직 등에 이어 소문으로만 떠돌던 언론통폐합이 현실화됐다. 두 번째 사진의 ‘각서’는 언론사 사장들이 강압적인 분위기 아래서 쓴 것이다. 힘들게 가꿔 온 회사를 포기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언론에 대한 각종 흉흉한 소문이 떠돌던 1980년 11월 12일. 일부 언론사 사장(사주)들이 보안사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는다. 퇴근을 앞둔 오후 5시쯤이었다.

“노태우 사령관이 좀 보잡니다.”

그러나 보안사에 도착한 이들은 사령관실이 아닌 작은 방에 안내됐다. 어두운 조명에 책상과 의자 2개만 덩그러니 놓인 방. 그곳에서 언론사 사장들은 수십 년간 가꾼 회사를 내놓으라는 황당한 주문을 받는다. 말이 되느냐고 고함도 쳐보고 읍소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밖에선 “서빙고(고문이 자주 자행되던 보안사 분실)로 모셔”하는 소리도 들렸다. 보안사 요원들은 “버텨봐야 소용없다”고 압력을 넣었다. 사장들은 결국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고서야 보안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틀 후인 11월 14일 오후 2시35분 서울 태평로 신문회관 2층 회의실. 한국신문협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냈다. 방송협회 역시 오후 5시 코리아나 호텔에서 같은 내용을 통과시켰다. 불법성과 강압성을 포장하기 위한 자발적 결의 형태였다.

이렇게 한국 언론사상 가장 무자비했던 ‘언론통폐합’은 현실로 드러났다. 전국 64개 언론사 가운데 46개사가 문을 닫거나 경영권을 빼앗긴 언론학살이었다. 민영방송으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동양방송(TBC), 서울 신아일보 등이 강제로 회사 문을 닫았다.
당시 보안사 측은 언론통폐합 후 없어지는 방송국에 “고별 방송시 울면 안된다”는 보도 지침까지 내려보냈다. 그러나 TBC 고별프로에서 가수 이은하씨는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부르다 울어버렸고, 3개월 출연 정지라는 가혹한 제재를 받아야 했다. 언론통폐합의 과정은 이토록 잔인하고 치밀하게 진행됐다.

권력과 언론. 한국의 언론사는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언론은 비틀린 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해야 했고, 정통성이 약한 권력은 언론을 통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 언론은 나름대로 시대 정신에 충실하려 했지만 할 말을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엄혹했던 시절에도 진실을 향한 기자정신만은 꺾이지 않았다.

1960∼70년대 언론 상황은 자유롭지 않았다. 언론인들은 기사 때문에 수시로 국가기관에 연행되는가 하면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편집국 간부의 집 대문이 폭파된 적도 있다(한국기자협회『한국기자 사십년』중). 그러나 불꽃 같은 저항도 있었다. 74년 10월, 동아일보를 필두로 35개 언론사가 ‘언론자유 실천 선언’ 운동에 동참한다. 기관원 출입을 거부하고 언론인 불법연행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등이었다. 이에 정부는 광고를 무기로 압박을 가했다. 한 예로 74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7월 14일까지 동아일보엔 세계에 유례 없는 광고 탄압이 자행됐다. 하지만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백지 광고’가 나가면서 독자들의 성금이 쇄도한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동아일보의 많은 기자들이 사측에 의해 강제 해직되기도 했다.

잠시 봄이 왔지만 80년대에도 진정한 언론자유는 꽃피지 못했다. 80년 7월, 반정부 성향의 언론인들을 숙정한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끝내 707명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어 신군부는 언론통폐합 작업에 착수해 신문 28개·방송 29개·통신 7개 등 64개 매체를 신문 14개·방송 3개·통신 1개 등 18개 매체로 강제 정리했다. 또 MBC 주식의 65%를 KBS가 갖게 해 사실상 전파매체 모두를 국가가 장악했다. 언론기본법이란 것을 만들어 문공부장관이 정기간행물 등록을 자의적으로 취소할 수 있게 했다. 다만 86년 들어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면서 공정보도 등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6공 정권은 5공에 비해 언론에 관대했지만 방송을 장악하려는 의도만큼은 숨기지 않았다.

2003년 6월 KBS ‘미디어 포커스’는 역대 정권을 거치는 동안 나팔수 역할을 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자신들이 군사정권을 유지·강화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많은 신문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언론을 길들여 장악하려는 정권의 압박은 엄청났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언론 상황은 급변했다. 탐사·추적 보도가 봇물을 이뤘고, 방송의 ‘PD 저널리즘’도 강화됐다. 9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발전한 인터넷 문화는 수많은 인터넷 언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외형적인 ‘자유’와는 반대로 언론사 세무조사, 신문법 제정 등으로 언론 자유가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 이해 집단의 압력은 물론 언론에 대한 법적 대응도 증가했다. 이런 변화들은 언론에 새로운 형태의 저널리즘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복 기자

미디어 혁명의 핵 블로그가 뜬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WAN) 총회에선 ‘블로그(Blog)’가 전면에 등장했다. 웹블로그를 통해 발표와 토론을 실시간 중계하는 등 전 세계 블로거(블로그를 하는 사람)들과 대화의 장을 펼친 것이다. 매개체가 글이라는 점만 빼면 현장에 앉아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엄숙한’ 신문 CEO(최고 경영자)들의 모임에 블로거가 정식 초청됐다는 게 이색적이다. 전통 미디어도 이 신흥 세력을 친구로 받아들인 셈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블로그는 인터넷을 의미하는 ‘웹(web)’과 항해일지를 뜻하는 ‘로그(log)’를 합성한 말이다. 한때 블로그는 자유롭게 글과 지식을 올리는 개인 일기장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1인 미디어’로서 위력을 발휘하며 미디어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혼자서 기자와 편집국장·발행인을 겸하는 블로그는 일반인을 기자나 평론가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특히 전문적인 식견을 인정받아 스타로 떠오른 블로거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서다.

또 블로그에 올린 글들은 인터넷 특유의 ‘퍼뮤니케이션(여기저기 글을 옮기는 것)’에 의해 급속히 전파된다. 국내 한 일간지 기자는 아나운서를 비하하는 내용의 글을 블로그에 썼다가 고소까지 당했다.
블로그는 기능적으로도 진화 중이다. 문자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 라디오·TV 기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Blog 대신 Vlog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비디오(Video), 말(Verbal)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앞 글자를 딴 것이다. 국내에선 최근 ‘팟 캐스팅’이라 불리는 개인 라디오 방송이 확산되고 있다. 누구나 라디오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블로그로 대표되는 ‘1인 미디어’의 등장은 정보 공급 방식도 바꿔놓고 있다. 이른바 RSS(Really Simple Syndication:매우 간단한 배급)로 불리는 서비스가 한 예다. 특정 블로그 주소를 간단한 무료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내용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자동적으로 뉴스가 배달된다. 이른바 맞춤 정보 시대의 개막이다.

그럼 이런 1인 미디어의 부상을 전통 언론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지금까지는 활발한 제휴가 눈에 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내에선 중앙·조선일보 등 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이 블로그를 통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이미 사이버상에서 탄탄한 매니어층을 갖고 있다. 또 미국에서도 그렇듯 조만간 스타 블로거와의 합종연횡도 활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한국의 인구 대비 블로그 사용자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확한 통계는 낼 수 없지만 활동적 사용자만 10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관련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언론사뿐 아니라 포털사이트들도 블로그 공략에 적극적이다. 이들은 포털의 문자 시대를 넘어 영상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그동안은 기술적인 한계로 개인 웹사이트의 압축기술 등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제 거의 해소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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