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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 과학이 발견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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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괴물 영화 중에서도 특히 아나콘다가 기억에 남는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을까, 아니면 뛰어난 연출력이 영화를 살린 것일까? 이제 시간이 흘러 배우들의 몸짓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내 기억 속에는 뱀이 한 마리 또아리를 틀고 있다. 뱀에 물려도, 혹은 사자에 물려도 결과는 같은 죽음이지만, 뱀은 단순히 내 몸을 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심을 공격한다. 영화 아나콘다는 그런 뱀에 대한 영화였고, 그 뱀이 주는 공포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사이언스 픽션(SF) 영화가 성공할 수 있는 요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SF 영화의 정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소재를 선택하고,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원칙에 충실하게 형상화 하는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사회현상으로 이어질 정도의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돈을 크게 버는 영화는 한 해에 두 편 정도는 나오기 마련이지만, 사회의 관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동력을 수반하는 일은 드물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영화는 세상의 관심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이 영화가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올 한 해에도 극장가에는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 영화가 상영되었다. 하지만 극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이슈가 되는 작품은 없었다. 머나먼 별에 사는 외계인도,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도 영사기가 꺼지면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든 소재였다. 이번에 크게 성공을 거둔 인터스텔라의 소재는 가장 단순하고 익숙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중력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뱀의 원초적인 공포를 드러내듯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중력을 엄격한 과학적 사실주의의 화면에 담았다. 그러자 숨어있던 평범한 소재들의 진정한 모습이 걸어 나왔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비극과도 같은 것이었다.

멈추고 싶은 시간의 유혹

예술의 상상력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물리학적인 제약조건을 벗어나게 되면 소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 매력이 사라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전 영화 인셉션은 바로 이 경계선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영화였다. 시간을 뒤로 돌릴 수는 없지만, 이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늦추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이 시간에 주어진 물리적인 조건이다.

인셉션 영화 속의 코브는 꿈의 심리적인 작용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 그 꿈 속에서는 시간이 현실보다 느리게 간다. 그것은 오늘 밤 꿈 속에서 인간의 오천년 역사를 단 오 분 안에 재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코브의 일행은 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유혹에 의해 꿈 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방식을 반복하며, 시간이 극단적으로 느리게 가는 의식 속으로 여행을 이어간다. 이렇게 시간을 지연시키면, 인간이 영생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답은 허구의 시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코브는 테이블 위에 팽이를 돌려 놓는다. 코브가 현실로 돌아온 것이면 그 팽이는 주어진 물리적인 회전을 마치고 쓰러질 것이다. 만일 또 다른 꿈의 세계로 이동한 것이면, 그 팽이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셉션의 이 팽이는 다시 인터스텔라에서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 부분은 이 글의 마지막에 다시 논의한다.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이 흘러도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 오지만, 그것이 두려워 시간을 정지해도, 그곳에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물리적인 성질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담았을 때,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에 숨어 있던 비극의 본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인셉션이 성공한 이유를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보다 더 도발적으로 이 물리적인 한계에 도전한다. 이전의 접근 방식이 다소 심리적인 시간이었다면, 이번에는 물리적인 시간에 도전한다. 단순한 심리적인 시간이 아니 실재로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도 늦출 수 있을까?

절대적인 시간은 없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물리세계는 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간격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간격은 절대적으로 같다고 물리학자들도 믿었다. 하지만 나의 시간과 당신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다.

상대성 이론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중력이 없는 이상적인 시공간의 현상을 기술하는 특수 상대성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중력이 있는 경우의 시공간을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가 불변한다는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관측 사실에 기인한다.

바람을 등지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 맞바람을 향해서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싶다. 기차와 같은 방향에서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는 기차의 속도가 느리게 보인다. 일상생활에서는 이렇게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다. 칸트가 인간의 의식 속에 이러한 절대적인 시공간에 대한 선험적인 개념이 있다고 한 것은, 지구상에서 경험하는 일상을 극단적으로 일반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빛을 향해서 달려가면 과연 그 빛의 속도가 빠르게 보일까? 19세기말의 마이켈슨 몰리 실험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그 빛의 속도가 빠르게 관측되었다는 사실은 보고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이 절대적이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나 기차처럼 느린 속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1초에 지구 둘레를 일곱바퀴 반이나 도는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의 속도에 근접할 경우에는 경험하게 되는 현상인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관측자에게는, 만일 공간의 격자 자체가 짧아지고 시간이 느리게 간다면 빛의 속도가 불변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공간에 중력이 존재하는 경우로 이해하면 된다. 이 경우에는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가 아니고 중력에 의해서 가속되는 관측자를 생각하면 된다. 지구 상공에서 엘리베이터를 낙하시켰다고 가정하자. 낙하가 시작할 때 한 쪽 벽에서 다른 쪽 벽으로 빛을 보내면,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 맞은 편 벽에 빛이 도착한다. 엘리베이터 안의 관측자에게는 이 빛이 직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엘리베이터 밖에 있는 관측자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빛의 경로가 휘어져 보이게 된다. 그 이유는 엘리베이터의 가속도에 의해서 빛이 한 쪽 벽을 떠났을 때 보다 맞은 편 벽에 도달할 때 더 먼 거리를 낙하하기 때문이다.

머리 속의 실험을 떠나 실재 관측되는 우주로 가보자.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한 빛이 질량이 아주 큰 천체를 만나게 되면 빛의 경로가 휘게 된다. 사실 빛 자체가 휘어진 것이 아니고 휘어져 있는 공간을 빛이 지나 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중력렌즈 효과라고 한다. 빛이 질량이 아주 큰 물체를 만나면 사방으로 휘어져 관측자에게 도착한다. 이렇게 되면 작은 점에서 출발한 빛이 반지처럼 동심원을 형성하기도 하고, 질량이 큰 천체 주변에서 빛나는 별들이 사실은 같은 별로 판명되기 한다. 아인슈타인이 질량에 의해서 공간이 휘어진다고 한 것이 증명된 셈이다.

만일 빛이 항상 공간의 결을 따라 진행한다고 한다면, 중력이 있는 곳에서는 공간이 휘어져 격자의 간격이 변하게 된다. 역시 빛의 속도는 불변하므로 공간 격자 간격의 변화는 시간 간격의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중력이 큰 곳으로 낙하하는 관찰자의 시간은 느려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간을 돌릴 수는 없어도, 최소한 시간의 흐름을 늦출 수 있다는 물리적인 한계 내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시간 자체에는 영화적인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았다.

쿠퍼가 살고 있는 시간대의 지구는 자연재해로 인해서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고, 황폐화되어 죽어가는 행성이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나사는 비밀리에 새로운 정착지를 우주에서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블랙홀 주변에서 인간이 정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행성들을 찾게 된다.

여기에 시간에 대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쿠퍼는 중력이 아주 큰 행성을 탐험해야 하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주어진 법칙에 의해서, 자신의 생명의 한계를 넘어선 미래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인류와 그 자신의 새로운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경험한 느린 시간 동안에 그가 사랑하는 딸은 이미 죽음의 영역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는 30여 년의 시간 안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지만,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시간 지연 현상에 의해서 길어진다. 쿠퍼는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생물학적인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다른 죽음이 있다. 나의 생물학적인 소멸로 인한 모든 것과의 단절, 혹은 그 모든 것들의 소멸로 인한 나와의 단절이다. 상대적인 시간의 맹점은 쿠퍼의 한 시간이 지구 상의 30년이 되었지만, 쿠퍼가 그 30년을 더 산 것은 아닌 것이다. 쿠퍼에게는 그 건 단지 한 시간인 것이고, 지구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 것에 불과하다. 쿠퍼의 실질적인 삶은 연장되지 않았지만, 상대적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쿠퍼는 익숙한 그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다.

영화 인셉션의 주요 주제가 다시 여기에서 반복된다. 영생과도 같은 시간여행 끝자락에 또 다른 형식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제작자가 시간의 법칙에 충실하지 않았으면 형상화할 수 없었던 시간의 원초적인 비극이다.

우주의 공간과 인간의 고독

영화 인터스텔라 처럼 사실적인 사인언스 픽션이었던 그래비티는 공간이 주는 공포감을 잘 보여 준다. 밧데리가 방전된 수트를 입고 멈출 수 없는 속도로 텅 빈 공간으로 사라지는 죽음을 목격한 모든 관객들의 머리 속이 하애졌을 것이다. 평범한 공간 속에 숨어 있던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두 번째 주제는 공간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처럼 인간은 경계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있다. 인류가 우주라는 공간에 놓여진 상황이 마치 이 고독한 섬과도 같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그 고독을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넘어서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빛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루스 자리의 별까지 가려면 4 년 여의 시간이 소요된다.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 그곳에 도착하려면 대략 8만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거기까지 도착하더라도, 지구를 대신해서 생명을 품어 줄 새로운 행성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마도 더 먼 곳으로 여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여행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끝은 대략 빛으로 대략 3*10^23 년 간 여행해야 하는 거리이다. 미래에 핵연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10^25 년 보다 더 짧은 시간에 우주의 끝까지 여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항해술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도 바다는 인간이 쉽게 건너지 못 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거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류는 지구라는 섬에서 본질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공간을 사이에 두고 우주와 마주하고 있다. 외계인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이 그들을 방문할 일도, 또 그들이 인간을 방문할 일도 사실상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나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 해도 아메리카의 신대륙은 캘리포니아 서부해안에서 이미 종결된 것이다.

킵 손이 과학과 문화의 만남을 위해 개최한 2006년 칼텍의 워크숍에서, 이런 공간의 제약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 논의했다. 과연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도전인가? 이러한 미래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브레인 스톰은 곧바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한 불확실한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구를 살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공간적인 제약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정도면 충분히 인류는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간 이동에 대한 유혹을 멈출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혹은 킵 손은 영화를 통해서 그 가능성의 최대치에 도전한다.

흔히 웜홀로 알려져 있는 아인슈타인-로젠 브리지는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유도가 가능한 이론적인 현상이다. 직관적으로는 블랙홀과 같은 거대한 중력원이 빠른 회전에 의해서 공간이 심하게 휘어져 들어가 마치 파이프 통로처럼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인간이 사는 공간이 3차원 이므로 이웜홀은 영화에서 처럼 다른 공간으로 가는 파이프가 아닌 공 모양의 구처럼 보인다.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물체의 궤적을 무한대로 연장하게 되면 수학적으로는 모든 물질을 쏟아내는 화이트홀로 나오게 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실재로 공간에 생겨날 수 있는 웜홀은 아주 짧은 시간에 생겨나 사라져 버린다. 웜홀의 한 쪽 끝에서 출발해서 다른 쪽 끝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자문한 킵 손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른 공간을 연결하는 웜홀이 음의 진공에너지에 의해서 안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도 우주선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스케일의 구멍이 아닌 양자역학적인 미시세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린 영화를 보고 있다.

이 정도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다면, 스타트렉의 워프도 아닌데 인정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영화에서처럼 어느 날 갑자기 토성 근처에 웜홀이 생겨날 수도 있다. 한가지 지켜야 할 팩트는 웜홀을 통해서 다른 공간으로 여행할 수는 있지만, 그 곳에는 반드시 블랙홀과 같은 거대한 중력원이 존재해야 한다. 영화는 이러한 물리적인 규칙에 충실했다.

영화 속의 브랜든 교수는 이 웜홀의 출현을 죽어가는 인류를 위한 초청장으로 생각했다. 웜홀을 통해서 무인 위성 선발대를 보내고, 이어서12개의 유인 우주선을 보낸다. 그 결과 생명이 정착할 가능성이 큰 세 개의 행성, 밀러, 만, 그리고 에드먼즈 행성을 찾아 낸다.

브랜든 박사는 나사를 설득하여 죽어가는 인류를 새로운 행성에 정착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하지만 브랜든 박사 본인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쿠퍼 일행은 지구로 귀환이 불가능할 경우를 대비해서 새로운 정착지에 문명을 재건할 수 있는 생명의 씨앗들을 가지고 간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숨어 있는 진정한 목적이었다. 웜홀이 존재하더라도 중력과 양자현상이 만나는 접점에 대한 관측자료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인류가 이러한 공간여행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비록 기적적으로 웜홀의 한 쪽 입구가 태양계 내에 열렸다고 해도, 그곳으로 인류가 이주해서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비극은 내가 살고 있는 생명의 섬에서 다른 생명의 섬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는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고립은 영화 그래비티에서 볼 수 있었던 무시무시한 공간의 심연에 놓여져 있다.
과학이 언급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건조해진다? 그렇지 않다. 21세기의 현대과학은 인간의 경험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힉스 입자를 비롯해서 있을 것이라고 예견한 모든 것들이 다 발견되고 있다. 이제 과학에서 사실주의를 언급해도 될 시점이 되었다. 회화의 기술이 완성되면 극사실주의 그림도 가능해 지는 것처럼, 현대과학은 예술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사실주의 작품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남미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을 때, 환상의 세계로 탈출구를 열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예술가도 있었지만, 가난한 자들의 연극을 주장하며 혼란한 사회의 원인을 진단하고 집단 각성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아우구스토 보알 같은 예술가도 있었다. 사실주의가 담아내는 화폭에는 우리들의 어려운 문제가 드러난다. 똑같은 일상이 그곳에도 있지만, 예술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일상의 아픔을 형상화 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그레비티나, 이 글에서 논의 중인 영화 인터스텔라는 현대과학이라는 기술적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한 사실주의 화면을 시도하고 있다. 그 자연에 과학의 이름으로 사실적으로 투영된 인간의 모습은 위기와 기회로 그려진다. 서양의 극을 감성적으로 완성한 모티브는 종교적 관념에 기반한 비극에 대한 개념이었다. 과학이 건조한 것이 아니고, 사실적인 과학에 의해서 그려진 세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의미의 근원적인 비극을 보여줄 수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사실주의 과학 영화에서 관객은 인간과 자연사이의 본질적인 비극과 마주한다. 비극의 시초는 신화 혹은 종교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인 비극은 자연자체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모티브는 연속성과 확장성이다. 현대과학이 이해하고 있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은 이 모티브에 대한 엄격한 제약 조건을 설정한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을 때, 일상에서 인지하기 어려웠던 자연이 주는 두려움과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비극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현대과학은 이제 결코 건조하지 않다.

중력,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힘이 중력이다. 그런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힘도 중력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출판되고 중력의 기원이 현대적으로 이해된지도 백 여년이 흘렀지만, 자연은 인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중력 현상들을 보여 주었다.

이 우주에는 만질 수도 없고 투명인간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질량을 가지고 나를 끌어 당기는 물질들이 존재한다. 25%. 그리고 심지어는 끌어 당기지 않고 척력과 같은 현상을 주는 반중력 물질들도 존재한다. 70%. 그럼 우리가 사실상 알고 있는 것은 단지 5%가 되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물질이 95%가 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중력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은 바로 이 중력에 의해서 지배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지구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중력현상의 위대함을 화면에 담았다.

쿠퍼 탐험대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밀러 행성이었다. 블랙홀과 가까운 곳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행성이다. 모선에 일행을 두고 떠나면서 모선에서 기다리는 대원과는 7년 후에 재회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밀러행성에 착륙하는 대원들에게는 한 시간이지만 중력에 의한 시간 연장 효과에 의해서 상대적인 시간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서해 바다를 여행하면 바닷길 깊은 곳까지 걸어가 볼 수 있다. 조수의 차이로 인해서 썰물이 열리는 길을 걸을 수 있다. 달의 인력으로도 이러한 현상이 생긴다. 그런데 만일 주변에 블랙홀이 있다면 어떠할까? 상상조차 하기 힘든 쓰나미가 몰려올 것이다. 쿠퍼 일행이 도착한 곳에 밀러는 없었다. 그가 발신한 신호는 강한 중력에 의한 시간 연장 효과에 의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수신되었던 것이다. 밀러는 이 행성에 도착한 이후 얼마되지 않아 사망했지만 그가 잠시 동안 보냈던 신호는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관측된 것이다.

쿠퍼 일행이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앞서 착륙한 밀러의 비행체를 덮쳤던 그 산맥같은 파도가 착륙선을 덮쳐온다. 블랙홀에 의한 조수이다.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공기도, 생명을 가능하게 할 물도 있었지만, 수시로 덮쳐오는 파도로 인해서 밀러 행성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파도를 피해 어렵게 모선에 복귀한 쿠퍼 일행은 밀러 행성에서 보내 짧은 시간동안23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현실의 세계가 종료된 블랙홀의 이벤트 호라이즌

쿠퍼의 여정은 블랙홀의 이벤트 호라이즌(사건의 지평선)에서 종료된다. 아멜리아를 에드먼즈 행성으로 보내기 위해서 쿠퍼는 희생을 선택한다. 우주선의 궤도를 이벤트 호라이즌에 근접시킨 후 중력에 의한 위치에너지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본인이 탑승한 착륙선을 분리시키며 블랙홀에 의한 위치에너지를 우주선의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여기서 얻은 에너지를 사용해서 아멜리아는 에드먼즈 행성으로 갈 수가 있었다. 밀러 행성에서의 23년, 그리고 다시 블랙홀 근처를 여행하며 흘러 보낸 수십년의 시간 동안, 아멜리아의 연인이었던 브라이언은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을 홀로 지키며 후발대를 기다리다 숨을 거둔다. 아멜리아는 그의 아버지인 브랜든 박사가 의도한 플랜 B 를 시작한다. 지구의 인류를 이주시킬 수는 없지만 생명의 씨앗을 이 새로운 정착지에 뿌리는 것이다.

2015년은 상대성이론이 나온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 백 년의 시간동안 중력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중력은 여기까지다. 쿠퍼가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면서 21세기 현대과학의 무대는 막을 내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팽이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인셉션으로 돌아가 보자.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코브는 현실로 돌아오지만, 영화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팽이를 멈추지 않은 채 끝난다. 난 과학적 사실주의는 블랙홀의 이벤트 호라이즌에서 끝나고, 그 이후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팽이가 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홀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신호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쿠퍼는 중력을 사용하여 지구와 교신을 시도한다. 초끈 이론에는 세상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4차원 이외에도 숨어 있는 다른 차원이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4차원의 시공간을 브레인이라고 하고, 숨어 있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벌크라고 한다. 이 벌크로는 전자기력도, 빛도, 그 어느 신호도 전파되지 않지만, 유일하게 중력만이 전달된다.

영화에서는 이 벌크로 전파되는 중력에 착안하여 블랙홀 내에서 지구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상정했다. 개연성은 있을 수 있지만 아직 알 수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고 보면 된다. 쿠퍼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서 경험한 중력과 양자역학의 상관성은 인류가 유일하게 해결하지 못한 양자중력을 이해하는 관측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쿠퍼는 바로 이 데이타를 지구에 있는 딸에게 보내는 것이다.

본인은 다차원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 웜홀을 통해서 다시 태양계로 복귀하고 홀로 떠돌고 있던 쿠퍼를 우연히 발견한 우주선에 의해서 구조가 된다. 쿠퍼에게는 아주 짧았던 이 시간이 그의 딸 머피에게는 백 여년의 세월이었다. 딸이 임종하기 직전, 그들은 다시 재회할 수가 있었다.

이 이후의 부분을 정확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도 없고, 이것이 쿠퍼의 환상이 아니라고 단정할 이유도 없다. 단지 한가지 확실한 것은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이후의 모든 중력현상은 이론적인 가정일 뿐 그 어느 것도 증명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난 킵 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일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초과학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영화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는 영화 산업의 새로운 미래 지향점을 제시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현대과학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이용한 예술 영역이라는. 여기에 왜 우리가 기초과학을 버려서는 안되는 지, 그 이유가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 접근했던 한국이 길을 잃었다. 지금까지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면 부가 증대되었다. 하지만 어느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돈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부를 지킬 수가 없게 된다. 돈을 쓸 줄 알아야 부국이 되는 것이다. 모든 투자에는 위험이 따른다.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미국과 유럽이 천문학적인 돈을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이유이다. 돈의 흐름도 사회체계의 흐름도 모두 유동적이다. 하지만 과학의 미래는 예측이 가능하다. 특정 기술이 개발되면 향후 그 기술이 어디에 적용될 수 있을지 알게되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볼 수 있는 가장 예측 가능한 창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21세기 현대과학에 입각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중력의 신비와 미래 가능성을 볼 수가 있었다. 그 가능성에 혹시 미래의 패러다임의 단초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송용선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우주거대구조 연구를 통한 우주초기조건, 우주가속팽창 원인 규명.상대성이론의 우주론적 검증). 미국 UC Davis 박사.시카고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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