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 이제는] 9. 금융상품 베끼기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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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독도 문제로 전국이 들끓자 A은행은 '금리우대 독도통장'을 개발했다. 그러자 반나절 만에 B은행도 비슷한 이름의 상품을 내놓았다. 두 은행은 서로 "우리가 먼저 상품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계 분쟁이 흔히 그렇듯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상품 베끼기 경쟁'은 어제오늘의 관행이 아니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끈 적립식 펀드가 등장하자 은행들은 일제히 유사 상품을 출시했다.

상품 이름은 물론 공략 대상도 차이가 없다. 상품 이름에 미래.부자.배당.노후 등의 용어를 붙인 특정 은행의 상품이 인기를 끌자 경쟁사들도 비슷한 이름의 상품을 내놓는다.

결국 금융사들이 모든 종류의 펀드 상품을 취급하면서 이 상품의 최대 특징인 차별성이 사라지고 만다. 펀드는 자산운용사의 투자 성과에 따라 수익률이 크게 달라지지만 상품 이름과 투자 구조가 비슷해지면서 겉모습만 봐서는 우열이 드러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은행들이 판매하는 적립식 펀드의 수익률은 운용사의 투자 성과에 따라 수익률(올 상반기 기준)이 4~35%로 벌어진다. 2003년의 주가지수연동상품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파생금융상품 기법을 접목해 내놓은 것이지만 비슷한 구조의 상품이 쏟아지면서 고객 입장에선 선택의 폭이 줄었다. 더구나 상품 설계의 핵심 기법을 자체 개발하지 않고 외국계 금융사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수익의 상당 부분이 외국계로 나가고 있다.

시중은행의 상품 개발 담당자는 "독창적인 신상품을 개발하고 싶지만 경쟁사들이 금세 베끼기 때문에 의욕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은행권은 2001년 말 '은행 신상품 선발이익 보호규약'을 만들었다. 독창적 상품을 먼저 개발한 은행에 2~5개월간 독점 판매할 권리를 줘 새 상품 개발을 촉진하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이 제도가 도입된 뒤 지난 5년간 신청 건수는 26건에 그쳤고, 그나마 6개만 승인받았다. 대부분의 상품이 독창성을 갖추지 못해 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독창적인 상품을 내놓기가 힘들 뿐더러 상품들이 거의 비슷비슷해 은행들이 신청 자체를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은행들이 최근 전산시스템을 통해 하루 만에 유사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것도 상품 베끼기가 만연하는 요인이다. 지동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외국계 은행이 소매금융을 급속도로 잠식하는 상황에서 국내 은행이 상품 베끼기에만 열을 올린다면 결국 경쟁력을 잃어 고객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국에선 파생상품이 잘 발달돼 있는 데다 고객별 맞춤형 상품이 많아 베끼기 문제가 한국만큼 심각하지 않은 편이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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