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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가 분석한 교과서 왜곡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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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군현 문제>
◇한군현의 위치

<일본교과서내용>
▲조선우도에도 농경과 금속기의 문화가 발달하고 한은 그곳에 낙랑군등의 사군을 두고 지배하었다.(동경서적 일본사 P15)
▲또 조선우도에서는 2세기 후반에 한족이 강하게 되고, 낙랑군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산천출판부 일본의역사 21)

<내용검토>
▲「한반도」에 한이 사군을 두고 지배하였다는 이 기술은 크게 두가지의 그릇된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한군현은 「한반도」 내에만 설치하었던 것으로 해석될수 있다.
둘째, 한군현이 설치될때의「한반도」에는 한군현 이외의 다른 토착적인 세력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음올 의미하고 있다.
한군현은 한반도의 일부와 남만주의 일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는것이 통설인데, 한반도 내에만 한정한 것은 한국사에 대한 종전부터의 타율성이론의 잔해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한군현 이외의 다른 토착적인 세력집단이 없었던 것처럼 표시한것은 한민족 전체가 한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그것은 한국사의 자주적 발전을 부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반도」에서는 2세기 후반에 한족이 강하게 되고, 낙랑군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는 의미는 역시 이처럼 「한반도」 전체가 낙랑군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이론과 같은 모호한 표현중의 하나이다.
▲도판은 별첨 <도판 1, 3, 4는 생략>
▲도판1(한대의 아시아)도 역시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인학자들의 학설에 따라 한군현의 위치를 한강이남 특히 호남·호서지역일부까지 확대시킨 것도 주목된다.
◇대방군 위치

<일본교과서내용>
▲후한의 말기에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신설하였다. 그의 역소(관위)는 현재의 서울(경성)근처였다고 추정된다.(동경서적 일본사 P22) <내용검토>
▲대방군은 황해도·봉산군 사리원역의 동남쪽 약산리(한리)에 있는 속칭 「당토성」으로 추정하는것이 정설과같이 되어있다. 토성 내에서는 후한(영제) 광화 5년(AD 182)과 서보(무제) 태화7년·10년(AD 271·274)명의 전(벽돌)과 와, 오수전, 무천등이 발견된바 있다. 특히 사리원역 동남쪽 2, 3이(한리)에 위치한 지점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명의 방태형의 전축분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로는 한강유역인 서울지역에서 이러한 유적이 일체 발견된 바가 없다. 따라서 일본교과서에서 대방군의 위치를 훨씬 남쪽으로 추정한 것은 조선시대 이래의 정치적 중심지인 서울을 대방군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의도한 것이다.

<한국사의 영역축소>
◇고구려 건국

<일본교과서내용>
▲조선에서는 중국동북의 송화강 유역에서 일찌기 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고구려가 조선 북부로 진출하여 4세기초에 낙랑군을 멸망시켰다.(삼성당 일본사 P26) ▲도판은 별첨 참조
▲도판2(산천출판부 일본의 역사 P23) ▲도판3(제국서원 고등세계사 P49) ▲도판4(삼성당 고등세계사 P15)

<내용검토>
▲고구려는 압록강의 북지류인 혼강(동가강) 유역인 환인지방에서 건국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송화강유역에는 이미 고구려 건국이전에 부여(예맥)가 존재하였고(사기식화지) 부여는 고조선과 합께 일찍부터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화강유역에서 고구려가 건국한 것처럼 기술한 것은 부여의 존재를 부인하며 한국고대사에서 한민족에 의한 국가형성 시기를 늦추고 고대의 한민족사의 영역을 축소시켰다고 볼수밖에 없다.
▲도판2의 해설에는 「7∼8세기의 아시아」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도판의 실제의 내용은 당의 최대영역만을 강조한 660년경의 상황인데, 이속에 발해를 마치 당의 영역처렴 표기합으로써 발해의 역사적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도판3, 4의 당대의 아시아 및 7세기후반의 동아시아의 현황도 역시 도판1과 같다.
또한 도판3에서는 당대라는 명칭아래 신라·당연합군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를 당나라의 영역속에 담고 당시에는 건국되지도 않은 발해를 당의 영역내에 넣어 혼란을 초래하고 특히 도판4에서는 신라까지도 당의 영역속에 넣은것은 사실을 호도한 놀라운 역사적 왜곡중의 하나이다.

<한국문화의 종류>
◇금속기와 농경문화

<일본교과서내용>
▲한은 그곳에 낙랑군등의 사군을 두고 지배하였다. 조선남부에는 중국으로부터 도작이 전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동경서적 일본사 P15) ▲금속기와 농경문화는 기원전 3세기까지에 조선에 전파되었다.(학교도서 일본사 P8) ▲무제시대에 조선을 정복하고 낙랑군 이하 사군을 두었다. 조선인은 그의 남부에서 일본에 금속기와 도작을 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학교도예 일본사 P8) <내용검토>
▲일본의 교과서들은 특히 미생(야요이) 문화가 강조되고 북구주에서 시작된 수도경작이 급속히 서일본 각지로 퍼지면서 특히 미생문화 중기로 되면 계급이 발생하고 드디어 각지에 소국가가 형성되는등 수도경작과 금속기가 사회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하는 동인으로 보고 그 동기를 한문화의 파급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고고학적 성과로서는 한국의 도작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 유적의 방사성 탄소연대가 BC1천50년으로 올라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상한년대와 일치한다.
또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늦어도 BC7∼8세기 까지는 발생하여 고조선문화의 모체를 이루었다.
또한 늦어도 BC4∼3세기경에는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형성하면서 철기문화도 소유한다.
실제 일본의 미생문화는 이와같은 청동기, 철기문학를 복합한 금속문화를 소유한 한국인이 북구주로 건너가 형성한 문화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농경문화와 금속문화가 마치 사군 설치와 어떤 관련성올 갖고 있는 것처럼 서술한 것은 과거의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삼국문화의 영향

<일본교과서내용>
▲한자가 전래되어 도내인이 사부(후비또배)로서 대화(야마또) 정권의 기록이나 외교문서의 작성둥 보무를 보았다.(삼성당 일본사 P29) ▲도내인의 자손인 안작지리(구라쓰꾸리 노도리)가 만든 비조대불, 법강사 역가삼전등 대륙의 영향을 받은것이 많다.(삼성당 일본사 P34) ▲6세기가 되어서는 중국 남조의 새로운 문화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하여졌다. 백제왕은 남조의 유교, 의·마등의 학술을 전하는 외에도 불교도 우리나라에 전했다.(산천출판부 일본의 역사 P9) ▲대륙으로 부터 많은 도내인이 이주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미 4세기 초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낙랑군의 유민이 다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들은 한민족의 사람들로 씨·성이 주어져서 동한씨·진씨등으로 칭하였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22) <내용검토>
▲일본의 .고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혹은 아재왕)때 아지기(아지길사)를 왜국에 보냈는바, 아직기가 경전에 통한다하여 응신천황의 태자인 황도 낭자가 그를 스승으로 삼고 한학을 배웠다.
아직기는 본국(백제)의 박사 왕인(화미길수)을 추천하니 왕인은 논어십권과 천자문일권을 가지고 건너가 치낭자의 스승이되고 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군신에게 경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료에 의하여 백제가 한자를 비롯한 유교문화를 전해준 것은 분명한데 모호하게 「도내인」이라고 표기한것은 한국문화의 동류를 의식적으로 모호하게 기술한 것이다.
교과서에 표기된 도내인의 개념도 『일본에서 중국의 중화사상을 도입하는데 따라 일본국왕의 덕화를 흠모하여 귀순한 귀화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념 자체에도 역사적 사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안작지리(안작조)는 백제인인 사마달지의 자손인데 안작지리를 모호하게 「도내인」의 자손으로 표기하고 그가 만든 비조대불과 법강사 석가삼존등을 대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는뎨 이것은 일본이 백제문화를 수용한 것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것이다. 또한 「대륙」이란 표현도 모호하다. 사실 일본의 비조문화(아스까문화)는 직접적으로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데 이를 명기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고대문화가 한국고대문화의 영향에서 성립된 것을 부정하는 의도적인 기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문화의 전파란 필연적으로 문화가 발달된 곳으로부터 주변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삼국문화도 역시 중국의 남북조문화의 영향을 받은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에 전파하여 준 문화는 중국문화가 삼국에 들어온 후 삼국에서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인데 한반도는 단지 문화의 교량적인 위치만으로 단순히 기술하고 삼국문화가 중국문화와 완전한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은 문화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이다.
▲일본문화에 크게 공헌한 것은 순수한 한민족으로 고구려에 멸망당한 낙랑군의 유민인 도내인이라는 것이 주목되나, 전반적으로 보아 일본의 아스까문화는 백제문화의 영향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구려와 백제등으로부터 역학·역학·의학등의 학문이 전해졌다. 계속하여 불교가 전하여졌다. 6세기경 백제의 성명왕이 불상과 불구를 조정에 헌납한 것이 불구가 공전한 때도 되어.(자유서방 신일본사 P23) ▲역사적 사실올 가장 온당하게 표현하였다고 볼수 있는데「조정에 헌납」 등의 표현은 윤색된 일본측 자료에서 나온 표현기술이라고 볼 수있다.
◇「임나경영」

<일본교과서내용>
▲고구려의 광개토왕(호태왕) 비문에 의하면 대화왕권은 군대를 조선반도에 보내어 고구려와 싸웠다고 볼수 있다. 이무렵부터 대화왕권은 가나지방(본래의 변한지역)에 세력을 뻗쳐 그 세력하에 들어갔다고 간주한 지역을 임나(미마나)라고 불렀다. 5세기 초부터 거의 1세기동안 5대의 왜왕(왜의 오왕)은 중국의 남조(송등)에 조공했고 조선남부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표시하는 높은 칭호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겻은 중국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고 꾀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대화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동경서적 일본사 P27) ▲ 「임나」는 본래는 조선반도의 남쪽끝에 있던 작은 나라의 이름인데 대화정권이 이곳믈 거점으로 가나의 여러나라 위에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그세력하에 들어갔다고 간주한 지역을 임나라고 불렀다.(동경서적 일본사 P27·주2)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화(야마또)정권은 자주 조선남부를 침범하여, 변한제국이 분립하여 통일이 늦어졌던 임나지방으로 세력을 뻗쳤다. 대화(야마또)정권의 군대는 한때는 고구려와도 교전하 였다.(삼성당 일본사 P26)
▲왜의 5왕은 중국왕조에 대해 남조선 여러나라에 대한 지배권의 승인과 고구려왕과 백제왕이 이미 수중에 넣고 있던 겻과 대등한 지위를 나타내는 관호를 되풀이 요구했는데 왜왕(부)에 이르러 비로소 그 염원을 풀었다. 이는 중국왕조의 권위를 이용하여 조선우도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것이다.(삼성당 일본사 P27) ▲일본은 임나지방인 가나제국(구 변한제국)에 영향력을 갖고 일찌기 임나의 조라고 칭하는 공납물을 받고 있었으나 임나지방의 가나제국은 신라·백제로부터의 압박을 받고있던중 562년에 신라는 가나제국의 태반을 점령하였다.(삼성당 일본사 P30) ▲4세기 말엽부터 5세기에 걸쳐 대화(야마또)정권은 백제와 연합하여 통일이 늦어진 변한을 발판으로하여 신라에 침입, 고구려와도 싸운것으로 생각된 대화정권은 그후에도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 또 변한의 땅을 임나(미마나)라고 패하고 세력하에 넣었다.(실교출판부 일본사 P18) ▲임나는 조선남부의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제소국의 총칭이다. 조선남부에서도 특히 이 지역에서는 대화조정의 세력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고, 백제·신라의 항쟁의 초점이 됐던 5세기 중반부터는 사자가 빈번히 왕래하고 임나구원의 관인과 군병을 보냈다.(삼성 「고」일본사 P17)
▲대화정권은 4세기 후반 백제의 요청으로 파병하여 신라와 싸우고 조선우도 남단의 임나 (미마나)라고 불리는 변한제국을 세력하에 두었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17) ▲해외로는 4세기 말엽부터 백제와 연합하여 조선남부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한편 중국남조에서 조공하여 조선남부에 대한 지배권의 승인을 요구한다.(실교출판두 일본사 P9) ▲대화정권이 거의 국토를 통일하고 조선우도에도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후 조선우도의 제민족사이에 민족적 자각이 높아져서 통일 국가 형성의 기운이 높아졌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13) ▲조선우도는 중국과 육지로 붙었기때문에 일찍부터 한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니, 그 우수한 문화나 철자원을 구하고 있었던 대화정권은 4세기후반 백제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내서 신라와 싸우고 조선우도 남단의 임나(미마나)라고 불리는 변한제국을 세력하에 넣었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13) <내용검토>
「임나경영」설은 대화(야마또) 정권이 4세기 후반에 대군을 한반도에 출병시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거의 2세기에 걸쳐서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하다가 신라가 가야제국의 태반을 점령하자(AD 562년)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나경영」의 발상은 근대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측은 그들의 문헌인 일본서기를 근거로 「임나경영」설을 주장하고 광개토왕비문과 칠지도등의 금석문으로 이를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록자체의 사실성에도 문제가 되고있는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위치를 한반도의 남부에 비정하는 것은 아직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고, 오히려 이와는 상반되고 일본내에 한국계 분국을 내세우는 학설과 전후 강상파부의 기마민족설도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문은 금석문의 해석상문제가 있고, 심지어 일본참모본부의 정보장교인 주구경신이 비문을 석회도부작전으로 조작했다는 설이 한·일학자간에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양국 학자간에 쟁점이 되고있는 학설을 일방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규정, 교과서에 서술한 것은 근대의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종래부터의 식민지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통일신라와 일본관계

<일본교과서내용>
▲신라와는 자주 사절을 교환했는데 일본이 신라를 종속국으로 취급하려고 했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몇차레 긴장했다.(학교도서 일본사 P39) (실교출판부 일본사 P39) <내용검토>
▲신라를 종속국으로 취급하려 했다는 것은 실제와 틀린것으로 식민사관에 의한 서술태도이며 허구적 「남선경영설」과 통하는 것이다.
◇왜구

<일본교과서내용>
▲고려와 중국으로 건너가 무역을 했는데 무역이 신통치 않을때는 자주 약탈을 했기 때문에 왜구라고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삼성당 일본사 P110∼111)
▲유력한 무사라든가 어민도 보내어 무역을 하게 되었다.(동경서적 일본사 P116)
▲해로를 무대로 활동하는 상인단이 있었다. 그들의 출신은 구주나 뇌호내해 연안의 토호나 상인들로서…, …이씨조선의 건국을 이성계는 이 왜구격퇴로 이름을 날리고 드디어 고려를 멸망시킨 것이다.(산천출판부 일본의 역사 P89) ▲연안의 토호나 민중이 무장선대를 조직하여 조선·중국의 연안을 노략하고 쌀이나 사람을 약탈하거나 무력을 배경으로 강제로 상거래를 하곤했다.(학교도서 일본사 P106) ▲고려나 이와 대체된 이씨조선도 원을 멸망시킨 명도 왜구의 대책에 고심하고,(자유언방 신일본사 P112) ▲조선이나 중국의 연안지방에서 약탈올 일삼는 자가 있어 왜구라고 해서 무서워했다. (제일학습부 신일본사 P108) ▲왜구의 침략에 괴로움을 당했던 고려는 일본에 사자를 보내고 왜구의 금지를 요구했으나,(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103) ▲토호·상인들의 일부는 14세기의 원말·명초경 해적이 되어 조선·중국의 연안을 침탈…, …왜구의 격퇴로 이롬을 떨친 이성계가 고려왕조의 친원파를 추방하며 이씨조선(이조) 을 세우고(1392) 얼마후 명의 종주권을 인정했다.(제국서원 신상세계사 P172) ▲남왜 즉 왜구라 함은 일본의 연안어민이나 토호가 국금을 위반하여 사무역이나 약탈을 행한자…(제국서원 신세계사 P69) <내용검토>
▲왜구의 출몰을 무역활동으로 보고 그들의 장기간의 대규모 해적행위를 부수적인 것으로 기술하였다. 왜구는 무지한 하층신분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세력은 일본 서해안의 토호·무사, 상인들로서 선단을 조직하여 고려나 중국의 해안을 혼란케 하였다.
한편 조선의 건국이 이성계가 왜구토벌로 실력을 쌓아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하여 고려멸망의 원인중의 하나로도 해석하기도 하고 왜구세력의 강성을 은연중 과시하고 있음.
일본교과서는 장기간 지속된 왜구의 약탈상을 일종의 변형된 상행위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조군전기의 대일관계

<일본교과서 내용>
▲…위만에게 국교의 개시와 왜구의 금압을 요구했다.(속경서적 일본사 P117)
▲조선도 또한 통교와 왜구의 금지를 일본에 요구, 양국사이에 국교가 열렸다.(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125)
▲이씨조선올 건국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왜구의 금지를 요구했다. 위만(족리위만)도 이에 응하여 국교를 열어 대마의 종씨의 통제아래 서국의 대명이나 부다의 상인이 참가하여 무역이 시작되었다.(실교출판부 일본사 P114)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대마를 습격했다(응영의 왜구). 그러나 조선에 침략의 의도가 없음올 알았기때문에 무역은 계속이루어졌다.(삼성당 일본사 P112) ▲조선이 더욱더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1510년 삼포의 거류민은 폭동을 일으켜 한때 무역이 정지되었다.(동경서적 일본사 P118) ▲조선측의 통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거류일본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후 진압됐다. (자유서방 신일본사 P118) ▲삼포란 부산포(부산) 내이포(제포) 감포(울산)의 3개항을 말하며…삼포의 거류일본인에게는 갖가지 특권이 주어지고 있었는데 차차 이 특권이 축소되어가는 것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진압되었다.(실교출판부 일본사 P114) <내용검토>
▲조선이 일본에 왜구의 금압을 요구한것을 『조선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하여 국교의 개시를 청한것』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시기는 오히려 일본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선 문물에 대하여 강한 욕구를 나타내고 었었다.
조선은 단지 왜구의 피해를 막기위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왜구의 본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대마를 습격했다』고 하여, 대마도가 왜구의 본거지가 아닌 것을 조선측에서 부당하게 습격한 것같이 기술하여 대마도정벌을 왜곡하였다. 또한 왜인에 의한 피해를 갖게하기 위하여 왜인의 활동범위를 최소한도에서 줄이려고 무역장소도 삼포로 정하였고 거류인선도 제한하였지만 해마다 세사미두를 사여하고 수직왜인의 가도룰 두어 그들을 회유하는 교린의 면모를 보였고 엄격한 통제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난을 일으킨 삼포왜란을 서술함에 있어서 조선측에서 『부당하게 의당 누려야 할 그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여 난을 일으킨것』같이 왜곡 기술하고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일보이 주로 면포를 수입하였다고하여 세사미두등의 경제적혜택과 대장경 서적등 문화 전체를 싣지 않고 있다. 고교 신일본사(학교도서)에서는 대장경 수입을 언급하었다.
◇임진왜란

<일본교과서내용>
▲수길은…명에의 출병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1587년(천정15년)에는 대마의 종씨를 통하여 조선의 입공을 요구했다. 조선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1592년(문연원년) 대군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수길이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병했다. 이렇게하여 약16만 대군을 동원한 조선출병은 실패로 돌아갔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커다란 손질을 입은 여러 대명사이에 크나큰 대립을 남겼다.(삼성당 일본사 P139∼140) ▲명과의 무역의 복활믈 포망한 수길은 명과의 중개를 조선에 의상하여 그것이 거부되자 1592년 친히 비전의 명호옥으로 대군을 출병시켰다…. 일단 군사를 철수했으나 교섭이 불성립으로 끝나자 1597년 다시 출병시켰다…. 다음에 수길의 죽음에 의하여 철퇴하였다.
명이라든가 조선이 입은 타격이 컸지만 일본군의 손해도 엄첨나서 풍신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었다.(동경서적 일본사 P147) ▲조선으로부터는 수길의 출병과 더불어 동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으며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목판활자의 인쇄술이 시작되었다. 또 무장들은 다수의 도공을 데리고 돌아와 영내에서… 제도업이 흥했다.(삼성당 일본사 P147) ▲또 조선에 대하여 수길에의 복속과 일·명무역재개의 중개를 요구했다.(학교도서 일본사 P139) ▲1592(문금원)년 일본탁은 명의정복올 명목으로 십삼만의 군세로 조선에 침입하여 명의 국경까지 진출했다.(삼성당 (고)일본사 P117) ▲당시 명은 해금정책을 취하고 있었는뎨 수길은 명과의 무역의 부활을 요구하고 대마의 종씨룰 통하여 조선의 인공을 명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전선은 조선남부에서 유착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우세했기때문에 보급도 곤란하고 고투끝에, 수길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군은 철군했다. (경장의 역) (실교출판부 일본사 P142) ▲1592(문녹원)년에는 인조와 정명의 안내를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해, 십오만의 대군을 파병했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142) 「조선에 대해 입공과 명을 정복하 기 위한 선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명정복의 준비를 개시하고, 비전의 명호옥(나고야)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1592(문나원)년 15만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그러나 강화는 성립하지 않고 1597(경장2)년 재차 조선에 출병했으나 전국은 부활했다. 때마침 그다음해 수길이 병사했기 때문에 일본군운 철병했다.(경장의 역) 문연경장의 양역의 과정에서 조선의 문화, 기술등이 일본에 들어왔으나 결국은 조선의 민중을 괴롭히고 막대한 전비와 벙력의 소모로 말미암아 풍신정권의 붕괴를 재촉하는 일인이됐다. (제일학습부 신일본사 P136) 전후 7년에 걸친 조선출병은 명과 조선의 반감을 사고 국내적으로는 방대한 전비와 병력을 소비하여 풍신(도요또미)정권을 쇠퇴케하는 원인이 되었다.(산천출판사 상세일본사 P160) 조선에 대해서는 2차에 걸쳐 무계획적인 출병을 하여 명의 원군이나 조선민중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쳐 좌절되었다. 1598(경장3)년 수길(히데요시)의 병사로 건군이 헛되이 철병했는데 이 조선출병의 실패는 풍신(도요또미)정권이 붕괴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산천출판사 일본의 역사 P113) ▲16세기말에 일본의 여러 세력을 총합한 풍신수길(도요또미 히데요시)은 2차에 걸쳐 조선에 출병했으나 일본의 원정군은 이조익 무장, 이순신등 조선민족의 강력한 저항과 명의 원군등에 부닥쳐 철병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의 국토는 황폐했고 또 일본은 제도·인쇄등의 조선인기술자를 데리고왔다.(삼성당 세계사 P73) <내용검토>
일본사 교과서의 임진왜란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다양하다. 그러나 표현만 다를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풍신수길은 명나라로 출병(정복)하기 위하여 혹은 명과 무역의 부활을 포망하여, 그 절차의 하나로 조선의 「인공(복속)」을 요구하거나 중개를 청하였으나 조선이 거절하여 「출병」하였다고 한다.
일본교과서에서는 수길의 조선침략의도를 잘알고 있으면서도 당시에 구실로 내세웠던 용어를 사용하여 내용을 호도하고 있다.
이러한 침략의 배경에는 일본내의 불평세력올 조선침략전쟁에 동윈하여 그힘을 소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물론 명과 왜의 고집과 그 민족의 희생이 강요되어 미개유의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종식을 대부분의 일본교과서에서는 단순히 풍신수길의 사망으로 인하여 이루어진것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수군의 우위, 의병의 활동, 명의 원군을 활용한 한민족 자체의 능력으로 국난이 극복되었음올 밝힌 책도 있으나 일부교과서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려하고 있다. 또한 강제로 붙잡혀간 인쇄및 제도기술자에 의한 공헌 사실을 게제한 교과서도 있으나 많은 서적의 유출과 주자학의 전수에 대하여 언급한 책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명이나 조선이 입은 타격이 컸지만 일본의 손해도 엄청나 풍신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하여 피해자의 고통과 변화는 생각하지않고 가해자의 변화만을 내세운 용렬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통신사왕래

<일본교과서내용>
▲조선과는 대마의 종씨의 노력등도 있고 해서 국교가 회복되어 1609년(경장14년)에는 통상조약도 체결되었다. 이후 무역은 종씨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장군의 대가 바뀌던가 할 때에는 사절이 내일했다.(삼성당 일본사 P151) ▲1607년에 조선사절(통신사)이 내일하였다. 더구나 1609년에는 종씨가 조선과 통상조약(을유조약)을 맺고, 이후 장군의 대가 바꿜때마다 수호를 목적으로 한 통신사가 내일하게 되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의 사절이 파견되었다.(동경서적 일본사 P161) ▲가강은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꾀하여 대마의 종씨로 하여금 교섭에 임하도록 했다. 1607(경장12)년에 조선사절이 내조했고 이후 장군의 대가 바꿜때마다 경하의 사절(통신사)이 오게 되었다.(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175) ▲1609(경장14)년에서는 조선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대마(쓰시마)의 종(소오)씨는 조약에 따라 매년20척의 무역선을 취합시키기로했다.(산천출판부 일본의역사 P117) ▲조선과의 관계는 1607(경장12)년에 막부(바꾸후)의 요청에 응하여 조선사절이 내일했고 이화 상군(쇼오군)의 대가 바뀌거나 할때에 통신사가 도일했다. 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류의 인물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 촉을 바라는 일본의 학자·문인들이 많아 사절단은 크게 환영받았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158) <내용검토>
임진왜란 후의 국교재개에 대하여 대체로 「대마의 종씨의 노력도 있고 해서 1607년 조선사절이 내조했고, 장군의 대가 바꿜 때마다 경하의 사절(통신사)이 오게 되었다고 하여 마치 조선측이 통상의 필요성과 욕구가 높아 대마도주를 중개로 하여 일본에 교역한 것 같이 기술하였고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의 사절이 파견되었다고 하여 일본사절이 더 자주 조선에 온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고교 신일본사(학교도서)만이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사절이 도일하였고「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류의 인물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을 바라는 일본의 학자, 문인들이 많아 사절단은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200여년간 계속된 양국의 선린관계가 어떠한 역사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지는 언급한 교과서가 없다. 조선에 있어서의 새 국왕의 즉위나 덕천장군의 대가 바꿜 때마다 왕래한 통신사의 의례적인 왕래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실제로 조선의 통신사는 오늘날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고 문인이나 학자 뿐 아니라 의사들도 숙소로 찾아와 조선의 문화와 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한일수교

<일본교과서내용>
▲1868년 정부는 조선에 국교재개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일본의 개국에 반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의도를 경계하여 도국정책을 계속 취했다.(삼성당 일본사 P226) ▲조선에 수교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끝까지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1873(명치6)년 서경륭성(사이고 다까모리), 판전퇴조등이 정한론을 주창했다.(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251) ▲조선은……종래 대마도반과의 외교양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일본과의 통교를 거부했다. (보교출판부 일본사 P222) <내용검토>
▲조선정부와 덕천막부는 17세기이래 선린관계를 유지하였고, 1860년대 초까지 대마도주를 매개로 덕천막부는 조선과 통교하고 있었다. 1868년 명치정부는 이러한 전통적인 외교관계의 급변경을 요구한 것이었는데, 후국교재개를 요구한 것으로 표기하여 이전에 통교 단절되었던 것으로 오해시키고 있음. 그리고 조선정부가 일본 명치정부의 요구를 거부한것은 그들의 요구가 종전의 의례에 어굿난 일방적인 행위이었음에 그 주원인이 있었는데, 이를 일본의 개국에 대한 반발때문만을 언급하고 있음은 그들의 이후의 도발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것임.
◇운양호 사건

<일본교과서내용>
▲강화도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회로 강경한 태도를 취해 다음해 2월 조선으로 하여금 일조수호조규를 체결케했다.(삼성당 일본사 P226)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정부의 명령을 받고 항해중 음료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조선의 한성부근의 요새지대인 강화도에 접근했기 때문애 수비병과 층돌했다.(삼성당 일본사 P226 주③) ▲1875(명치8)년의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강요하여 다음해 일조수호조규를 맺었다.(백유서방 신일본사 P222)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 침입한 일본군함이 포경을 받음(강화도사건)을 기회로 조선에 대하여 군사력으로 개국을 강요했다.(실교출판부 일본사 P230) ▲1875(명치5)년 조선서안의 강화도 부근에서 조선에 대한 시위행동을 위해 측량을 하고있던 일본군함이 포격을 받은사건.(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176) ▲1875년9월 조선을 개국시키기 위해 시위행동을 하고 있었던 일본군함이 강화도 포대에 접근해서 교전했다.(강화도사건) (학교도서 일본사 P218) ▲조선에 대해서는 1875(명치8)년 조선의 영해에 접근한 일본군함이 강화도에서 포격을 주고받은 것을 기회로 강경한 태도로 개국을 요구…(동경서적 일본사 P232) <내용검토>.
▲운양호사건(강화도사건)은 이건에 대두된 정한론과 관련되며, 조선의 동남아 연해를 탐색한 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도발행위임.
▲조선의 영해를 불법침범한 외국군대에 대하여 발포한 것은 그 퇴거요구에 부응하는 일본군함에 대한 정당한 경고사격이었음.
▲운양호는 「강화도에 접근」한 것이아니라 조선측의 발포를 유도하기위하여 조선의 영해를 불법적으로 침범한 행위임. 이를 「접근」이라 표기한 것은 불법적으로 영해를 침입한행실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임.
▲운양호의 불법침범으로 비롯된 사건을 강화도사건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들을 침략행위를 모호하게 하고 전가시킨 것임.
◇강화도조약

<일본교과서내용>
▲일조수호조규는 조선을 일본과 대등한 「자유의 나라」로 정했으나 조선을 개국시키고 영사재판권을 일방적으로 인정케하는등 조선으로서는 일본이 서양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과같은 성질의 것이었다.(삼성당 일본사 P226)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하여 무역상 유리한 입장을 차지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성을 강화시켜 청국에 대해서도 정치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하였다.(동경서적 일본사 P243) ▲정부는 강경태도로 조선정부와 교섭하여 다음해 2월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개국하고 일본의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불평등조약하에 놓이게 했다.(학교도서 일본사 P218) ▲일본은 강경한 태도로 불평등한 일조수호조규를 맺고 조선진출의 발판을 만들었다.(제일 학습부 신일본사 P200) <내용검토>
▲조선은 이 조약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유독촌인」으로 인정받았으나, 일본은 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근거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배제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기반을 구축한 것이지 조선의 「자유」나 「독립성을 강화」시킨것은 아니었음.
▲일본이 묘양예국과 맺은 조약과는 성격이 다르며 조선침략믈 드모한 편무적·일방적인 것이었음.

<개화·척사운동>
◇임오군란

<일본교과서내용>
▲1882(명치15)년 경성(현 서울)에서 국내개혁파의 군제개혁이라든가 물가등귀에 반발하는 병사가 봉기하고 이에 합류한 민중이 왕궁을 습격하고 다시 군사고문의 파견등에 의해 군제개혁올 지원하고 있던 일본의 공사관올 방화·파괴하였다.(동경서적 일본사 P243)
▲정부에 반대하는 거대의 반란이 일어났을때 그 총부리는 일본에게로 들려져 일본공사관이 반일파의 습격을 받았다.(동경서적 일본사 P240-1)
▲일본에의 접근에 반대하는 배타주의적인 대원군에 끌린 조선민중이 일본공사관을 포위하는 사건(임오사변). (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266)
▲1882년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군인의 폭동(임오군란)이 일어나 일본공사관등이 전격되었다. 반란의 직접적 원인은 당시 일본인 군사고문등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군제개혁에 따른 실업의 불안과 급료의 지배에 있었으나 그 배후에는 정치의 부패와 일본의 진출에 봉한 민중의 반발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기회로 조선에 출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청은 일본의 기선을 제압하고 조선에 출병하여 조선의 정치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하였다.(삼성당 세계사 P163) ▲조선에서는 1882년7월 일본군인이 지도하는 새군대가 우대를 받고 있는것에 불만을 품고 구군대의 병사들이 경성(서울)에서 반란을 일으켜, 민중도 가세하여 일본공사관에 불을 질렀다.(임오사변) (학교도서 일본사 P229)
▲식량위기를 배경으로한 군인의 폭동이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에서 발생하여(임오군란) (실구출판 세계사 P265∼6)
▲1882(명치15)년의 최초의 정변에서 당시 친일정책을 취하고 있던 정부에 대해 군사교관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웠다. 이때 일·청 양국이 간섭해서 수습됐고 일본은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이나 군대주류권을 강력히 요구하여 승인케했다(임오의 변). 그후 조선의 정국은 친청파가 주도했다. (제일학습사 신일본사 P236)

<내용검토>
▲임오군란은 개화정책에 대한 수세력의 반발이며, 동시에 일본 세력에 대한 항일인데 「정부에 대한 반란」을 표기하여 사실을 은폐·호도하고
▲1880년부더 실시된 개화정책을 친일정책이라 하고
▲개화에 대한 구식군대의 반발을 대원군이 일으킨 것으로 서술하였으며
▲임오군란이 청일에 의해서 수습된 것으로 서술했다.
◇갑신정변

<일본교과서내용>
▲조선에서는 이후 청과 손을잡고 정권의 유지를 꾀하는 사대당과 일본의 예에 따라 정치개혁을 하려는 독립당끼리 대립이 격렬해졌다. 1884년 12월 독립당은 공사관경비의 일본병의 지원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청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했다.(갑신정변) (삼성당 일본사 P241)
▲그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여러제도의 근대화를 꾀하려는 독립당과 종래의 국내체제라든가 청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대당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884(명17)년 독립당의 김옥균등은 일본공사관의 수비대의 응원으로 정변을 일으켰으나……(갑신정변) (동경서적 일본사 P243)
▲청은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의 보수파를 지지하여 종속관계를 강화했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에 의존 세력확대를 꾀하려고 한·개혁파의 김옥균등은 일본공사관 수비대의 지원을 얻어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우세한 청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갑신사변) (학교도서 일본사 P229)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국과 일본과의 대립이 깊어져 또 조선내부에서도 청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사대당에 대하여 일본과 맺어서 개혁을 꾀하자는 독립당이 대두했다. 독립당은 1884년의 청불전쟁을 계기로 일본수비대의 지원을 얻어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청국군의 내원에 의하여 부대로 돌아갔다. (보교출판부 일본사 P245)
▲조선에서는 중국에 의지하여 군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이른바 사대당과 이에서 탈피,조선의 근대화를 꾀하려는 독립당의 정치가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독립당의 김옥균등은 일본에 의존하여 정권을 장악하려고 1884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청군의 개인으로 실패로 돌아갔다.(갑신사변) (제국서원 신상세계사 P243)
▲조선정부는 일본과 멀어져서 청국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산천출판부 상세일본사 P267)

<내용검토>
▲「사대당」과 「독립당」은 조선을 개화하려는데는 입장이 같았으나 그방법에 있어서 사대당은 청의 예에 따라 점진적인 개량을 추진하려 하였고 독립당은 일본의 예에 따라 급
진적으로 정치체제의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음. 일본교과서는 두 세력을 편파적으로 기술하여, 「사대당」은 청국을 종주국 정권유지만을 도모한 세력으르 규정지어 그들의 본의와 역할을 간과하였고, 「독립당」은 일본과 맺어서 「정치개혁」 또는 「제도의 근대화」 를 꾀하는 진취적인 세력으로 은연중에 부각시켜 일본의 역할을 과시하려 함.
▲갑신정변의 계기와 실패원인을 다만 일·청에 의존한 데서 비롯되고 청군의 반격으로 실패한것으로 서술한 것은 조선내에서의 개화세력의 자주적 성장을 은폐한 것임.(일본 식민사관의 한국사에 대한 타율성 이론의 하나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한국사에 있어서 그 역사적 성격이 각각 분명한 것인데 경성사변으로 합쳐 통칭한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치 않은 것임.
제국주의 침략과 민족의 저항
◇방곡령

<일본교과서내용>
▲조선에서는 청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하여 조선의 대일정책도 청의 힘을 배경으로 강경해졌으며 조선무역에 있어서 일본의 비중은 차차 멀어졌다. 1889년 조선의 지방관청이 사전의 통고없이 곡물의 대일수출을 금지하자(방곡령) 일본도 강경한 태도를 취해 1893년 손해배상의 요구를 조선으로 하여금 인정케했다. 이렇게하여 조선을 둘러싼 일·청 양국의 대립은 심화되어 가기만 했다.(삼성당 일본사 P251∼2)

<내용검토>
▲조선의 대일정책이 강경화된 배경을 청세력의 증강에서 찾아 기술함으로써, 일본의 심화된 경제적 침투로 인하여 일어난 배일감정의 고조를 은폐함.
◇동학농민운동

<일본교과서내용>
▲1894(명치27)년 조선에서는 지방관리의 역정과 제외국의 침공에 대항해서 동학을 신앙하고 단체를 중심으로한 농민반란이 조선남부 일대에 번졌다.(동학당의 난) 조선정부의 의퇴로 청군이 원군을 파유하자 일본도 공사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이유로 출병했다.(동경서적 일본사 P254)
▲배외적인 농민의 반란인 동학당의 난이 일어나자 청국은 조선정부의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출병함과 동시에 천진조약에 따라서 이것을 일본에 통지해 왔다. 일본도 이에 대항하여 출병했기 때문에 반란은 얼마후 진력되었다.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의 신봉자를 중심으로한 농민반란이 남조선일대로 퍼져 정부군올 격퇴하고, 세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동학당의 난) (학교도서 일본사 P237)
▲1894(명치29)년 5월 조선에서 농민의 반란(동학당의 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청이 조선의 요청에 따라 반란진압을 위해 출병하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출병했다. (삼성당 일본사 P252)
▲조선에서는 1894(명치29)년, 농민의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동학의 난).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청국이 파병하자 일본도 이에 대항해서 출병하여 일청 양국의 대립은 격화했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240)
▲조선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한다. 러시아·영국·프랑스둥 여러나라도 조선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급격한 경제사회의 변화가 일어나 조선국민의 생활을 압박했다. 때문에 농민사이에서 배외적인 종교가 일어나 가톨릭을 서학이라고부른데 대해 이를 동학이라고 했다.(자유서방 신일본사 P240)
▲같은 무렵 조선에서는 지방관리의 압정과 일본을 비릇한 한국의 침입에 반대하는 농민의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고 1894(명치29)년에는 동학의 조직과 연결된 농민반란군과 정부군사이에서 전쟁상태가 일어나고…(갑오농민전쟁). (삼성당 (고)일본사 P194)

<내용검토>
▲반봉건, 반침략의 동학농민운동을 「농민반란」으로 규정하여 그의 역사적인 성격과 의의를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민중운동의 성장, 발전을 묵살하려고 함.
또 동학농민활동의 원인을 「지방관리의 압정」과 「여러 외국의 침공」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여 그 주된 원인인 일본의 침략성을 호도함.
동학농민운동올 「조선남부 일대」에서 번진것으로 국한시켜 전국적인 규모의 민중운동을 일부 지역적인 란으로 축소시켰음.
▲일본의 조선출병 목적도 「공사관원과 거류민보호, 청국의 세력균형 유지」등을 이유로 하고 있으나 사실은 조선및 중국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갑오개혁

<일본교과서내용>
▲일본은 천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병력을 보내서 조선의 내정개혁을 지도했다. 이에 대해 청국은 일본의 철병을 요구하여 일·청 양국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 대립속에 러시아나 영국이 개입하여 사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제일학습서 신일본사 P236∼8)
▲일·청전쟁을 맞이하자 「거국 일치」의 구호와 합께 이 전쟁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싸움이라는 주장이 전개되어 국민은 전방의 보도에 정신없이 기뻐하는 한편 뒤떨어진 아세아를 문명화하는 것은 일본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퍼져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우월의식이나 또는 멸시의 의식이 강해졌다.(삼성당 (고)일본사 P202)
▲일본도 거류민의 보호를 목적으로 출병해서 개입하여 일·청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의 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을 격파하여 1895년 하관조약을 체결했다. 이에따라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제국서원 신상세계사 P259)
▲일청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천황의 권위는 한층 높아짐과 동시에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대한 우월감이 국민사이에 전파되었다.(삼성당 (고)일본사 P195)
▲일본인의 마음속에 조선인·중국인에 대한 우월감이나, 나아가서는 멸시관마저 조성되어 일본의 국민과 조선, 중국의 사람들사이의 커다란 분열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그후의 일본과 조선·중국과의 불행한 역사가 보여주는 사태를 남게한 것이다.(학교도서 일본사 P267)
▲조선에서 국제시장을 찾고 있던 일본과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조가 대립하게되어 일청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일본군은 해륙양면에서 청군을 압도, 1895년의 하관(시모노세끼)조약으로 조선에의 간섭 포기….(제국서원 신세계사 P192)

<내용검토>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고 행한 내정개혁 요구를 내정개혁의 지도로 서술함.
▲이 기구은 이른바 「탈아입관구」론에 근거해서 일본이 조선·중국에 그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 때의 일본인의 대아시아관을 천명한 것이다.
서구 열강은 동양사회에 그 세력을 침투시키면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동양은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이며, 이 정체된 동양사회를 개발시켜주는 것은 서구내의 사명이라고 내세웠다. 이러한 서양사회 정체성 이론을 일본은 그들의 조선·중국등의 침략을 합리화하는데 적용하였다. 즉 일본은 「정체된 동양사회」와는 별개로 서구사회와 같은 역사발전을 겪었다고 생각하고 문명화된 일본이 뒤띨어지고 야만상태에 있는 조선·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사회를 문명화 시켜주는 것은 일본의 사명이라고 내세워 그들의 동양침략을 합리화·정당화 하였다. 이러한 일본인의 우월의식이나 한국인·중국인에 대한 멸시감이 그후의 동아시아사의 전개에 미친 부정적 영향과 결과를 상기할때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여 서술한 의도와 목적은 무엇일까를 생각케 한다.
◇민비시해

<일본교과서내용>
▲삼국간섭 후의 조선에서는 러시아의 진출이 두드러졌으므로 세력의 회복을 기도하는 일본의 공사는 1895(명치30)년에 대원군을 옹립한 정변을 획책했다. 이 정변으로 민왕비가 왕궁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조선국민들 사이에 반일감정을 높이는 결과로 끝났다.(속경서적 일본사 P261 주②)
▲1895년 10월, 왕비 민비가 일본군대와 민간인에 의해서 왕궁에서 학살당함으로써, 일본에대한 반감은 한층 높아졌다.(삼성당 (고)일본사 P195)
▲조선의 정치실권을 쥐고 있었던 민씨 일족은 일본의 움직임에 반발하여 러시아에 접근했다. 이에 대하여 한성에 있었던 일본의 수비대나 민간인은 1895년10월에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정권을 세웠으나 친일정권은 무력해서 다음해 1896년에는 친러파의 정권이 조직되었다.(삼성당 세계사 P165)

<내용검토>
▲민비시해사건은 조선정부내에서의 친러세력올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하여, 주한일본공사 삼포오부가 직접 주도자행한 사상에 전례없는 만행이었는데, 이를 조선내의 정치세력의 대립에서 야기된 것으로 전도시키거나 일본군과 민간인에 의하여 저지른 것으로 기술하여 일본정부의 책임을 은폐 왜곡하였음.
◇일본의 대륙침략

<일본교과서내용>
▲일영동맹의 개정이라든가 주-「테프트」협정에 의해 한국에 있어서의 권한을 영국과 미국에 인정케 한 일본은 포츠머드조약의 조인후, 한국에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동경서적 일본사 P264)
▲일노전쟁이 시각되자 일본은 조선에의 진출정책을 급속하게 추진했다.(삼성당 일본사P263)
▲1905년 8월에는 아메리카의 대통령「테도아·루스벨트」의 중재에 의해서 포츠머드조약이 성립되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조약에 의하면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과 동삼성 남부의 러시아 이권의 계승등을 러시아로부터 승인받았지만….(삼성당 세계사 P181)
▲1905년 또오쓰마스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따라 일본은 한국에서 우월권을 인정받았으며 러시아로부터 남청태(가로후로) 및 「극동반도의 조차지, 장춘 이서의 철도(남만주경도)를 취득했다.(제국서원 세계사 P277)

<내용검토>
▲일제는 노일전쟁 이전에 이미 한국에 대한 이른바 「보호정책」을 결정하고 전쟁중에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시켜 군사 기지를 점령, 확보하였다. 전쟁후 일제는 군대를 증파배치하고 무력시위하에 「을사조약」을 강요, 본격적으로 침략하였는데, 이를 진출이라고 기술하여 그들의 침략사를 왜곡하였음. <한일강정서∼징병부분은 내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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